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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조선왕조실록의 공노비 해방 교서

by 신동훈 識 202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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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2권, 순조 1년 1월 28일 을사 3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

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에 관한 윤음을 내리다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중용(中庸)》을 읽고 있는데,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구경(九經)이 있으니, 그 여섯 번째에 이르기를, ‘서민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 하였다. 주 부자(朱夫子)는 이를 해석하기를, ‘백성을 내 아들과 같이 사랑하여 보살핀다는 것이니, 내가 일찍이 책을 덮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들이 그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라도 반드시 나아가야 하고, 어버이가 그 아들은 양육함에 있어서 질병에 걸리면 반드시 구원해야 하니, 임금과 백성 사이에 있어서도 간곡히 돌보아 주고 기향(蘄向)하는 것이 또한 부자 사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우리 나라의 내시(內寺) 등 각 아문(衙門)에서 노비를 소유하여 이를 전하는 것이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자는 우리 나라에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생각건대 팔조는 곧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이다. 이것은 식화(食貨)를 으뜸으로 삼았으니 양생(養生) 때문이고, 사구(司寇)가 금법(禁法)을 관장하였으니 화란(禍亂)을 그치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팔정으로 우리 나라 백성들을 가르쳤는데, 우리 나라 백성들은 단지 팔조만 알고 팔정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도둑질한 자를 몰입(沒入)하여 노비로 삼는 것이 곧 팔조의 하나인 것이다. 이는 대개 사구의 법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중용》의 구경(九經)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세의 이른바 노비의 제도에 있어서 관가에서는 이들에게 지극히 가혹한 책임을 지우고, 사람들은 이들을 지극히 천박하게 대우하여 그 족당(族黨)을 구별하고 그 사는 곳을 달리하였으므로, 늙어서 죽을 때까지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정사의 말단(末端)인 것이다. 일찍이 기자(箕子) 같은 성군(聖君)으로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내가 듣건대, 기자의 말에 이르기를, ‘다섯 가지 복을 모아서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을 학대하지 말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백성들의 부모가 되면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 하였으니, 나는 이로써 노비의 제도는 기자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음을 더욱 알 수 있게 되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숙종 대왕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조정에 하문(下問)하신 다음 노공(奴貢)의 반과 비공(婢貢)의 3분의 1을 견감하셨고, 우리 영종 대왕께서는 여러 사람의 괴로움을 안타깝게 여겨 비공을 면제하고 또 노공의 반을 견감하셨다. 그러나 내사(內司)에서 추쇄(推刷)하는 폐단은 여전하여 그 살갗을 찔러대어 정성을 실토(實吐)하게 하고, 그 젖을 어루만져 잉태함을 증험했으니 여리(閭里)가 소란스러워서 닭과 개 같은 짐승들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허다한 사람들이 그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지아비는 그 아내와 이별해야 하고, 그 어미는 자식과 이별해야만 하니 가슴을 두드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마 이별하지 못하였다. 가끔 불문[空門]에 몸을 투탁하여 스스로 대륜(大倫)을 끊어 버리고, 여자는 흰머리를 땋아 늘인 채 저자에서 떠돌며 걸식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관리는 날마다 그 집 앞에 가서 전화(錢貨)를 독촉하여 치고 때리며 호랑이같이 꾸짖는데, 함부로 점고(點考)하면 한 마리의 소값을 써야 하고, 인족(隣族)에게 침징(侵徵)하면 1백의 가호(家戶)가 재산을 빼앗기게 되니, 길을 가던 나그네들도 한심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민망해 하였다. 아! 저 호소할 곳 없는 곤궁한 백성들은 유독 무슨 죄란 말인가? 우리 선조(先朝)에 이르러 덕음(德音)을 반포하여 추쇄(推刷)를 혁파하는 명을 내리던 날 늙은이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기뻐하여 춤추었으니, 크고 두터운 은택이 궁벽진 해변에까지 미친 때문이었다. 그러나 14년에 이르러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말하기를, ‘내사의 종이 유해(遺骸)를 지고 함양군(咸陽郡)에 호소한 자가 있었습니다.’ 하자, 성심(聖心)이 이를 측은하게 여기시고 놀라셔서 그 문적을 불태우게 하셨으며, 제도(諸道)의 방백(方伯)들에게 두루 하문하여 십행(十行)의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고 일곱 번 그 폐단을 고치셨으니, 그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을 만하고 참된 성심이 돼지와 물고기 같은 미물에게까지 미치었다. 이에 도신(道臣)의 장계(狀啓)와 비국(備局)의 계사(啓辭)가 많아서 좌우에 쌓였는데, 신충(宸衷)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밤낮으로 근심하시면서 식사에 당하여 수저를 들지 못하시고 침석(寢席)에 드셔서는 상탑(狀榻)에서 서성거리며 잠을 들지 못하셨다. 그래서 연석(筵席)에서 유시하고 조정에 고유(告諭)하시기를 반복해서 정녕하게 하셨는데, 유사(有司)의 신하는 휴명(休命)을 대양(對揚)하지 못하였고 비록 한두 차례 감액(減額)은 하였으나, 이는 진실로 우리 선조께서 널리 베푸신 성의(盛意)가 아니었다. 기억하건대, 옛날 우리 선조께서 훈유(訓諭)하시기를, ‘우약(羽籥)을 베풀지 않아도 백성들이 기뻐하고, 헌상(軒裳)을 더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음양(陰陽)이 그 정기(精氣)를 통섭(統攝)하고 인의(仁義)가 그 사업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념으로 간을 맞춘 국을 들어 그 정신을 화평하게 하고, 좋은 소리를 들어 그 뜻을 공평하게 가지고, 좋은 말을 받아들여 그 정사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좋은 행실을 실천하여 그 덕을 공평하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백성들이 노비의 명칭 때문에 억울함을 품어 위로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한 까닭에 풍우(風雨)가 적기를 잃고 화맥(禾麥)이 영글지 않고 있으니, 내가 이러한 재해를 근심하여 마음이 화평하지 못하다. 내 마음이 화평해지는 것은 노비를 혁파하는 데 있다.’고 하셨으니, 이는 조정의 신하들이 받들어 듣고서 칭송한 것이었다. 이제 내가 왕위를 물려받아 예를 행함에 있어서 사모하고 부르짖으며, 이어받은 큰 책임을 생각하고 큰 기업을 태산 반석과 같이 공고히 이루는 것이 곧 그 뜻과 그 사업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할 것이니, 그 뜻과 사업을 이어받는 것으로는 노비의 제도보다 앞서는 것이 없을 것이다. 또 더욱이 왕자(王者)가 백성에게 임하여 귀천(貴賤)이 없고 내외(內外)가 없이 고루 균등하게 적자(赤子)로 여겨야 하는데, ‘노(奴)’라고 하고 ‘비(婢)’라고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똑같이 사랑하는 동포로 여기는 뜻이겠는가? 내노비(內奴婢) 3만 6천 9백 74구와 시노비(寺奴婢) 2만 9천 93구를 모두 양민으로 삼도록 허락하고, 그대로 승정원으로 하여금 노비안(奴婢案)을 거두어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불태우게 하라. 그리고 그 경비(經費)에 쓰이는 노비의 공물은 장용영(壯勇營)에 명하여 대급(代給)하게 하여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아! 내가 어찌 감히 은혜를 베푼다고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선조께서 미처 마치지 못하신 뜻과 사업을 보충하여 밝힐 따름이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오직 천만 년에 이르도록 전려(田廬)에서 편안하게 생업을 영위하며 그 분묘(墳墓)를 지키고 적기(適期)에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 날로 번성할 것이며,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즐겁게 삶을 구가(謳歌)하게 하라. 그리하여 내가 선조께서 노비를 아들처럼 여겨 돌보고자 하신 고심을 본받는 데에 부응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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