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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조조고릉(曹操高陵) Cao Cao Mausoleum

by taeshik.kim 201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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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묘역, M2가 조조묘다


안양고릉(安阳高陵) 혹은 위고릉(魏高陵) 혹은 서고혈2호묘(西高穴2号墓)라고 하며, 동한(东汉) 말년(末年) 위왕(魏王) 조조(曹操·Cao Cao·155~220 CE)의 능묘다. 고릉(高陵)이란, 위 무제 조조가 죽어 묻힌 무덤을 말한다. 


曹操陵墓 소재지는 지난 2천년간 미궁이었다가 2009年 12月 27日 하남성문물국(河南省文物局)이 안양시(安阳市) 안양현(安阳县) 안풍향(安丰乡) 서고혈촌(西高穴村) 일대라고 확정 공포하고, 그에 따라 중국국가문물국(中國国家文物局)을 통해 조조묘임이 굳어졌다. 2010年 2月 4日, 조조 고릉은 하남성 제5차 비준 문물보호단위(文物保护单位)가 되었다. 


후한 왕조 권력을 장악한 曹操는 후한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 유협(劉協)한테서 건안(建安) 21년(216) 여름 5월에 위왕(魏王·King of Wei)에 책봉되고, 同 25년  정월 23일 경자(양력 220년 3월15일)에 낙양(洛阳)에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묘제(墓制)와 관련해 조조 자신이 내린 명령이 두 차례 보인다. 하나는 건안(建安) 23년(218年) 6월에 반시(頒示)한 것으로 《삼국지(三国志)·위서(魏书)·무제기(武帝纪)》 동 해당년월 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날 장법(葬法)을 보면 반드시 척박한 땅에다가 무덤을 썼다. 서문표(西門豹) 사당 서쪽 언덕을 골라 잡아 수릉을 삼아 높은 곳을 터로 삼되, 봉분은 만들지도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 주례를 보건대 총인(冢人)이 공(公)들의 묘지를 관리한다 했으니, 무릇 제후(諸侯)는 (황제능) 오른쪽과 왼쪽 앞에 쓰고 경(卿)과 대부(大夫)는 (황제릉) 뒤에 쓰니, 한나라 제도는 이를 일러 배릉(陪陵)이라 했다. 공경대신과 열후와 장군으로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수릉을 배위해야 하며, 그 넓이로 묘역을 삼아 (관련 묘들을) 충분히 수용케 해야 한다” 


“古之葬者,必居瘠薄之地。其規西門豹祠西原上為壽陵,因高為基,不封不樹。周禮冢人掌公墓之地,凡諸侯居左右以前,卿大夫居後,漢制亦謂之陪陵。其公卿大臣列將有功者,宜陪壽陵,其廣為兆域,使足相容。” 


<조조묘 평면 배치> 


이를 흔히 죽음에 대비해 조조가 미리 그 묘제를 규정한 명령이라 해서 《종령(终令)》이라 하거니와, 그에 견주어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명령은 유언성 명령이라 해서 《유령(遗令)》이라 하거니와, 역시 《三国志·魏书·武帝纪》 해당년조에 적힌 구절은 다음과 같다. 


(건안) 25년 봄 정월에 (위왕이) 洛陽에 이르렀다. (오나라) 손권이 (촉나라) 관우를 참(斬)하고는 그 머리를 (낙양으로) 전했다. 경자일(庚子日)에 왕이 낙양에서 붕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유명하기를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 법을 따를 수는 없다. 장례를 마치면 모두 상복을 벗으라. 군사를 거느리고 수자리를 지키는 자는 모두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담당 관청에서는 각기 할 일을 하라. 평상시 입는 옷으로 염(斂)하고, 금이나 옥 같은 진귀한 보물을 묻지 마라’고 했다. 시호를 올려 무왕(武王)이라 했다. 2월 정묘일(丁卯日)에 고릉(高陵)에 장사했다. 


(汉建安)二十五年 春正月, (魏王)至洛阳。权击斩羽,传其首。庚子,王崩于洛阳,年六十六。遗令曰:‘天下尚未安定,未得遵古也。葬毕,皆除服。其将兵屯戍者,皆不得离屯部。有司各率乃职。敛以时服,无藏金玉珍宝。’谥曰武王。二月丁卯,葬高陵. 


이를 보건대, 조조는 철저히 경제성을 고려한 소위 박장(薄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며, 그에 대비되어 각종 보물을 무덤에다가 쏟아붓는 소위 후장(厚葬)을 경멸했음을 본다. 


<조조묘 투시도> 


曹操高陵은 일찍이 여러 번 도굴 피해를 보다가 2005년에 이르러 발견되고, 2008年에 河南省文物局考古研究所가 그에 대한 구제발굴을 실시하고, 2009년 12월 27일, 北京에서 언론매체를 통해 조조고릉이 河南에서 고고발굴을 통해 확인되었음이 공포되었다. 2010년 1월 29일, 중국국가문물국은 하남 안양 동한 대묘(大墓) 묘주(墓主)가 조조임을 확인했다. 이에 현지에서는 조조고릉박물관 건립 계획이 추진되어 그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무덤 발견의 직접 발단은 2008년 12월, 벽돌공장 건설에서 비롯됐다. 그에 필요한 진흙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즉각 공개되지는 않았다. 지방당국에서는 이 무덤에서 도굴한 유물 중 ‘魏武王’이라는 글자가 적힌 석제품 하나를 압수했을 뿐이었다. 그해를 넘겨 발굴조사 결과 250점을 헤아리는 각종 유물이 수습된 것이다. 개중에는 부장품으로 들어간 석패들이 있었다. 


그의 묘는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좌서조동(坐西朝东)이며, 평면 “甲”자 모양이다. 지표에서 묘실 바닥 가장 깊은 곳까지 거리는 약 15m이며, 묘가 점거한 전체 면적은 대략 740평방미터다. 밖에서 묘실로 통하는 길은 비스듬히 들어가며, 두 개 현실을 갖춘 전묘(砖墓), 곧 벽돌묘다. 현실을 향해 비스듬히 깊어지는 통로인 묘도 사파(墓道斜坡)는 길이 39.5m에 너비 9.8m이며, 이를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전실(前室)과 후실(後室)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4개 딸린 방인 측실(侧室), 그리고 墓道로 구성된다. 예서 말하는 묘도(墓道)란 전실과 후실을 연결하는 통로인 용도(甬道)를 말하는 듯하다. 


묘광(墓圹)은 평편 사다리형(梯形)을 띠며, 동서 길이 18m에 동쪽 너비 22m, 서쪽 너비 19.5m다. 


고고학 전문용어가 난무하니, 이 대목은 영어판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이해엔 한결 좋다. 


The underground tomb has two main chambers (front and back), four side chambers and connecting passages. An inclined passage 39.5 metres long and 9.8 metres wide leads to the underground chambers.


墓葬에서는 刻铭 石牌가 59점이나 출토됐으니, 모양으로 보면 장방형과 규(圭) 등이 있다. 이들 중 석규(石圭) 8건이 묘주가 누군지를 판정하는 근거를 제공하니, 개중에는 “魏武王常所用挌虎大戟” “魏武王常所用挌虎大刀” 그리고 “魏武王常所用挌虎短矛” 등의 글자를 새긴 것이 발견됐다. 도굴품 중 돌베개인 석침(石枕) 위에는 “魏武王常所用慰项石”이라는 글자가 있어, 이를 통해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조조 생전에 사용한 두침(枕头)임을 확인했다. 


<조조묘 출토 석패1>


묘장에서 발굴한 石壁은 3결(块)이고, 규(圭)는 1결(块)이다. 圭璧은 帝王陵墓 등의 등급이 비상히 높음을 보여주는 표준이다. 이 외에도 陵墓를 파는 과정에서 인골 3구가 확인됐으니, 감정 결과 1구는 남성으로 대략 60여 세이며 신장은 150~160센티미터로 추정됐다. 나머지 두 구는 여성이며 각각 20여 세와 40여 세로 감정됐다. 도굴 과정에서 조조 두개골은 칼날을 만난 흔적이 발견됐다.  


이 묘장은 출토 문물과 화상석(画像石) 등이 한위(汉魏)시대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1998년에 서고혈촌(西高穴村) 서북부 지점, 그러니까 이 묘에서 약 800m 지점에서 一块 노잠(魯潛) 묘지(墓誌)가 출토됐으니, 그는 后赵 건무(建武) 연간에 부마도위(驸马都尉)였으며, 문헌에서는 그의 묘가 魏武帝陵에서 서북쪽으로 43보 지점이라고 기록한다.  


묘장은 규모가 비교적 크고 출토품 중에는 황제묘에서 출현하는 규(圭)가 있다. 나아가 출토 명패(铭牌)와 석침(石枕)에는 “위무왕(魏武王)”이라는 글자가 확인된다. 문헌을 볼 때 조조는 “위공(魏公)”에 책봉되고 나중에 “위왕(魏王)”이 되었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는 나중에 그의 아버지를 추봉하여 “무황제(武皇帝)”라 하니 곧 “위무제(魏武帝)”다. 출토품에서 보이는 “魏武王”이라는 글자는 이런 역사기록과 부합한다. 


<조조묘 석패2>


이 墓葬은 曹操의 《遗令》에서 제창한 박장(薄葬) 명령과 서로 부합하며, 묘장 규모는 비록 크지만 벽화(壁画) 등등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겨우 병기와 석침 등의 기본 물품만 발견됐다. 《遗令》에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업성 서쪽 언덕에 묻으라(吾死之后……葬于邺之西岗)”고 했으니, 西高穴이 위치한 곳이 정확히 고대 업성(邺城) 서쪽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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