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초강대국 唐에 당당히 맞서 한민족 토대 마련
[중앙선데이] 입력 2017.04.02 02:39 수정 2017.04.02 03:47 | 525호 23면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위해 국운을 건 전쟁에 나섰을 때, 당(唐)은 유일한 세계제국이었다. 당시 당은 냉전시대 동서 양쪽을 양분한 맹주들인 미국과 구소련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비축한 세계제국이었다. 혼자 힘으론 숙적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하기 버거웠던 신라는 이 세계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통삼한 전쟁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이를 위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당과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에는 마침내 고구려마저 쓰러뜨림으로써 통일을 달성한다.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 차지’
밀약 깨고 야욕 드러낸 당에 맞서
일진일퇴의 기나긴 전투 끝에 승리
이민족 당 끌어들여 통일했지만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 상실
“사대주의, 불완전한 통일” 시각도
이런 신라의 정복 전쟁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 근대 역사가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신라가 독자적으로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민족인 당을 끌어들인데다가, 그 전쟁이 끝났을 무렵 고구려 영토 중 대동강 이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단재는 신라를 사대주의 국가라고 몰아붙였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사대주의자의 전형으로 폄훼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각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불완전한 민족통일로 규정하는 사관(史觀)의 토대가 됐다. 그리하여 한국사는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시대’가 되지 못하고, 당이 차지한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발해를 신라와 병렬로 놓고는 ‘남북국 시대’라 부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은 한국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은 이때 와서 비로소 생성 토대를 마련했으며, 비록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 상당 부분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북한을 합친 현재의 대한민국 영토는 이때 사실상 그려졌기 때문이다. 신라·고구려·백제를 아울러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부르는 시대 구분 인식은 신라가 일통삼한을 달성한 이후 형성된 개념이다. 삼국은 무려 700년이나 각기 다른 역사문화 전통을 유지한 별개의 국가였다. 당시의 삼국 관계는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하는 적대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교특사 김춘추, 당 태종에게 읍소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면, 당이 유일 제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삼국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가 급속도로 당과의 결합을 강화하는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협공했으며, 배후에선 왜(이후 일본으로 개칭)가 백제와 밀착해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로서는 당 외엔 우군이 없다시피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김춘추는 험한 바닷길을 이용해 당과 왜국을 오가면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외교를 벌였고, 국내에선 김유신이 전장을 누비며 국토를 수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에 대해 굴종과 아부만 일삼은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 역시 신라의 맹방은 아니었다.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본기는 진덕왕 2년(648), 외교 특사로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난 김춘추가 읍소한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친 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한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침략을 자행하다가 더욱이 지난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는 (신라가)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은 김춘추의 읍소가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 파견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급부로 신라는 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한 듯하다. 신라는 관리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고칠 것을 맹세했는가 하면, 김춘추는 데리고 간 아들 문왕(文汪)을 눌러앉혀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宿衛)로 삼기도 했다. 신라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던 김춘추에게 이는 인질 공작이었다. 아들까지 인질로 받치면서 당을 배반할 뜻이 없음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교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쪽에서 무엇을 약속하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게 마련이다. 진덕왕본기가 전하는 이때 외교전 모습은 실로 단순하지만 이후 전개된 사태와 그 와중에 폭로된 신라-당 간 외교 밀약 중 하나를 보면 신라도, 당도 매우 계산적이었다.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같이 멸한 신라와 당은 직후 기나긴 전쟁에 돌입한다. 당은 애당초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에 내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직접 통치나 다름없는 괴뢰국을 백제와 고구려에 세웠는가 하면, 우방국 신라조차도 다 먹을 속셈임이 점점 확실해졌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당은 비록 실질적 권한이 없기는 했지만,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편제하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제 신라에 남은 카드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자주 외교와 자주 국방은 포기한 채 당 제국에 편입되어 제후국으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칼을 들고 결사항전하든가 해야 했다. 문무왕을 필두로 하는 신라 수뇌부는 결사항전의 길을 택했다.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과 창을 빼어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신라 문무왕 .11년(671), 각자의 선전 포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외교문서가 문무왕과 당군 사령관 설인귀(薛仁貴) 사이에 오가던 중, 외교 특사 김춘추가 이세민과 합의한 외교 밀약의 일단이 폭로된다. 이보다 33년 전인 648년에 있던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 실린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 외교 답서 한 구절은 이러하다.
“선왕(先王·태종무열왕)께서 정관(貞觀) 22년(648)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조칙에서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지닌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를 낼 기일을 정해 주셨습니다.”
648년 신라와 당 사이에 오간 외교 밀약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데서 성사되었음을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신라로서는 숙적 백제 정벌이 염원이었으며, 당은 연개소문이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시종 당에 대항한 고구려 정벌이 오랜 꿈이었다. 당으로서는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밀약에는 이행 약속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른바 전후처리 협상도 진행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영유하고, 그 이북은 당이 차지한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약속이 30여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양국 관계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맹방이요, 어쩌면 주군이라 할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을 빼들고는 결사항전에 임하는 정당성을 선전하는 구호가 된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직접 통치를 꾀하는 당을 향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던 것이며, 그것이 이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김유신 “개도 주인이 다리 밟으면 무는 법”
신라는 한반도 곳곳에서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기나긴 전투에서 마침내 승자가 되었다. 문무왕 15년(675), 신라는 칠중성(七重城) 전투에서는 유인궤(劉仁軌)에게 패했지만, 설인귀가 이끄는 대군을 천성(泉城) 해상에서 만나 대파했는가 하면,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신라는 마침내 이듬해 겨울 11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끈 수군이 설인귀 휘하 당 수군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만나 4000여 명을 수장함으로써 기나긴 나당(羅唐)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그에 앞선 660년, 백제를 함께 정벌한 직후 당군에서는 이참에 동맹국 신라조차 정벌할 마음을 품었다. 이를 간파한 김춘추는 군신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화의책이 논의되자 김유신이 나서 쐐기를 박는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이(당과의 전쟁)를 허락하소서.”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된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세계 제국이던 당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신라의 담대함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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