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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호불 정영호 박사 1주기를 맞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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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9 저녁 경주 황남맷돌순두부에서


내 페이스북 계정에서 '과거의 오늘'을 훑으니, 작년 오늘이 미술사학자 호불(豪佛) 정영호(鄭永鎬·1934~2017) 선생이 타계한 날이라, 관련 포스팅이 뜬다. 이날 나는 경주에 있었는지, 다음과 같은 짤막한 말로써 소식을 전했다.  

《부고》

호불 정영호 선생이 타계하셨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추후 전하겠습니다.

듣자니 오늘 경주에서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는 모양인데, 그의 지인과 제자들이 주동이 되어 비석을 마련한 모양이며, 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감포 이견대 인근일 것이다. 호불은 이곳에다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4~1944)과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1918~2010)과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1918~2010) 기념비를 세운 바 있다. 진홍섭 기념비가 맨나중에 섰는데, 그 한 쪽 자리가 비어 주변에서는 호불이 자기 기념비를 위한 자리로 남겨놓았다는 말이 좀 있었으니, 그 내막이 무엇이건 결과로 보면 그리 된 셈이다. 


내가 이 소식을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먼저 전한 까닭은 당시 나는 야인인 까닭이다. 작년 오늘 다른 포스팅을 보면 연합뉴스를 상대로 하는 해직무효소송, 그리니깐 복직 소송 2심에서도 내가 이겼다는 소식이 있다. 그 판결 소식을 나는 경주에서 전화로 변호사를 통해 통보받았다. 내가 하필 이날 경주에 있던 이유는 앞 포스팅에서 약속한 같은날 '자세한 소식'에서 드러난다.   

《고 정영호 선생의 마지막 일화》


전날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도교 강좌를 한 나는 경주서 그날을 유숙하고 이튿날인 지난주 수요일 오전 선문대 특강을 위해 아산천안발 ktx를 플랫폼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런 나를 누군가 아는 체 하며 말을 걸어오는데 성림문화재연구원장 박광열 형이었다. 경주에 들리면 반드시 연락하는 형이지만 요즘 그러지 못한 까닭은 형한테 피치 못할 바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인 일이냐니 이러저러해서 서울로 급거 상경하는 일이라 한다. 정영호 선생이 쓰러졌단다. 새벽 사모님 연락을 받고 상경하는 길이라며 소생할 가망은 없단 말을 들었다 한다. 이날 낮 열두시에 중환자실 면회 때 아마 마지막 인사를 해얄 거 같단다. 전날 저녁에만 해도 청로회라 해서 문화재업계 원로들 친목 모임에 나가 그리 즐기는 술과 담소를 여느 때처럼 하고 기분좋게 귀가해 자다가 새벽에 변이 닥쳤단다.


그러면서 형은 일단 함구를 당부했다.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나는 지키지 않았다. 이내 조선일보 문화재 담당 허윤희 기자한테 사정을 알리면서 선생의 부고를 준비하라 부탁했다. 그리한 까닭은 워낙이나 고인이 허 기자를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고선 나로선 비록 현직기자는 아니었지만, 서영일 한백문화원장에게 일이 생기면 즉각 연락을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다. 서원장은 고인의 제자이며 더구나 그 이사장 박경식 단국대 교수는 그 수제자로 고인의 뒤를 이어받았다.이미 유가족은 장지 물색까지 들어갔고 박 교수 역시 비상대기 상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더는 소식이 없어 연명치료가 계속되나보다 했다. 참 묘하다. 허 기자가 오늘 아침 고인의 안부를 물은 카톡 메시지를 나한테 보낸 직후 단국대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이 운명하셨단다. 나는 이 소식을 다시 경주에서 접했다.


지금 내 폰엔 고인의 생전 대담록 세 시간 분량 녹취록이 있다. 얼마 전 성림문화재연구원이 황복사지 인근 발굴성과를 발표한 그날 고인은 경주에 있었다. 불국사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저녁 무렵 성림 사무실에 있었다. 그날 나 역시 발굴현장에 있다가 선생이 계시다는 말을 듣곤 찾아갔다.


무슨 계시가 있었는지 모르나 녹취를 따야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사무실에 가니 한겨레 노형석 기자는 그 한 쪽에서 열심히 기사 작성 중이었다. 나는 폰을 꺼내 녹음기를 털었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풀고자 했으며 그런 물음에 고인은 신이 나는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그러는 사이 신라왕경조사단 사무실에서 기사 처리한 허윤희 기자가 합류하고 어찌어찌하다 자리는 저녁 식사 자리로 옮겨갔다. 나는 일부러 고인 자리 맞은편에 앉아 녹취를 계속했다.


고인 역시 사람이라 호오가 갈린다. 하지만 고인 그 자체가 한국문화재 근현대사다. 황수영 진홍섭 박사를 사사한 그를 빼고 20세기 한국문화재사 한국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거인이다. 그는 울트라 수퍼 거인이다. 그런 고목이 쓰러졌다.


그때 따지 못한 녹취는 시간나는 대로 보완한다 결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허여하지 않고 그가 그토록이나 섬긴 부처님이 그를 이끌었다. 아마도 고인에겐 마지막이었을 이 녹취록을 나는 월간 문화재사랑 기고문으로 정리하려 한다. 


극락왕생하소서.


빈소 :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30호실(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3길 88)

발인 : 2017년 4월 10일 월요일 08시.

1차 장지 : 서울시 서초구 양재대로 12길 74 서울추모공원(10시 10분 ~ )

연락처 : 02-3010-2230(빈소 연락처)

2017. 2. 9 저녁 경주 황남맷돌순두부에서

 


작년 2월 10일에는 나는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페이스북 내 계정에다가 했다. 이에는 아래에서 말하는 그날 내가 내 폰으로 포착한 사진 2장이 첨부됐다. 

 

엊저녁 성림문화재연구원 뒤풀이 자리서 이 재단 명예원장인 정영호 선생과 자리를 함께했다. 주민등록상 1934년생이지만 내가 듣기론 1930년 3월생인 고 창산 김정기 박사와 동갑이다. 여쭈었다. 누가 위시냐고? 


"내가 그 놈보다 생일이 빨라"


녹취록을 풀어봐야겠지만 한달인가 빨랐다. 한데 그보다 한 달 더 빠른 이가 맹인재 선생이라 한다. 선생은 문화재위 창립 당시 제1호 전문위원이라 한다. 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합쳐 도합 43년을 재직했다 한다.


아마 9일로 기억하는데 나는 그의 빈소가 차려진 아산병원으로 찾아가 그의 마지막을 배송했다. 이 무렵 나는 야인으로서 문화재청이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인 《월간문화재사랑》에 정기기고를 하는 중이었다. 한국 문화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생존자를 한 사람씩 인터뷰 하는 형식이었으니, 그해 1년간 계속한 이 시리즈에서 호불은 유일한 고인이었다. 


호불 역시 다룬다 내심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느닷없는 타계로 일정에 급변동이 생겨, 그해 5월호 잡지에다가 그 몇달 전에 녹취한 자료를 토대로 인터뷰를 꾸몄다. 아래 첨부물이 바로 그것이다. 


http://m.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9362&bbsId=BBSMSTR_1008&pageIndex=2&mc=MS_05_02


그의 빈소에서 호불 제자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인터뷰 분량은 세 시간 정도 된다. 인터뷰는 그것을 대담식으로 단순히 풀어놓는다고 해서 대담록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피와 살을 붙이는 일은 인터뷰어의 몫이다. 증언과 회고에는 항용 오류와 과장 축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판단하는 몫 역시 인터뷰어다. 짧은 지면 제한에 인터뷰 내용을 첨삭해 인터뷰를 꾸몄다. 


앞선 포스팅에도 잠깐 보이지만, 고인은 나이가 언제가 의문이었다. 주민등록상으로는 분명 1934년이지만, 본인은 언제가 그것이 오류임을 주장했다. 그를 오래 안 사람들도 잘 몰랐고, 그의 제자들도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지만, 누구도 몰랐다. 내가 저 만남에서 굳이 그것을 물은 이유는 이런 의문이 많았고, 주변에서도 항상 의심을 한 까닭이다. 


그와 생전에 참으로 가까웠던 1930년생 창산 김정기 박사와는 언제나 친구로 지냈으니, 이는 호불이 실제 출생한 해가 1930년이라 주장한 까닭이다. 창산은 그런 줄로 알다가 언제인가 외국에 여행을 함께 가다가 여권에 호불 출생연도가 1934년으로 적힌 걸 보고는 충격을 받고, 배신감을 느껴 한동안 말을 하지 않은 일도 있다고 한다. 나이를 속였다 해서 말이다. 


본인은 분명 1930년 생이요, 더구나 창산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르다 했지만, 이것도 믿을 수는 없는 듯하다. 그의 빈소에서 그와는 비교적 가까운 친척이요 제자이기도 한 어떤 이를 만났더니, 그 역시 이를 믿을 수 없어, 빈소에서 만난 호불 친계 가족을 대상으로 이를 탐문했더라. 빈소에서 호불 친동생을 만나, 이를 캐물었더니, 뿔싸, 호불은 1934년생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는 영원한 미제로 남길 수밖에 없을 듯하나, 각기 다른 증언을 채록해 둔다. 


2017년 5월호 월간문화재사랑



호불은 문화재계 지인 몇 사람과 청로회(靑老會)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에는 당연히 창산과 호불이 포함됐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한 김동현 박사 역시 단골이었다. 호불이 떠난 직후 김동현 박사를 만났더니, 고인의 마지막을 전했으니, 그것을 나는 4월 22일 페이스북에다가 다음과 정리했다. 


<<김동현 박사가 전한 정영호 박사 마지막 모습>>

4월 1일, 언제나 그렇듯이 청로회(靑老會) 모임을 종각 역 인근 중국집 안래홍에서 했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 오후 5시에 그곳에서 모인다. 그날도 같이 모였다. 그날이 마침 정 박사 생일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생일 케익도 켜고 했다. 나도 청로회 멤버다. 그렇게 담소하고 즐겁게 보내고 헤어져서 집에 가셨다가 그 다음날 새벽 화장실에 가시다가 쓰러지셨다. 


청로회 멤버 중 벌써 4명이 갔어. 씁쓸해...이젠 청로회도 힘들 거야. 정 박사가 회장이었고, 모임을 주도했는데 가셨으니 힘들지 않겠어?


***오늘 어떤 자리에서 뵌 김동현 박사 전언이다. 

박사껜 죄송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김박사를 비롯한 원로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면, 녹음기를 튼다.


기타 고인과 얽힌 일화 서너 개가 있으니, 언제 짬을 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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