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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에드워드 기번, 로마의 폐허에서 대작을 구상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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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

 
그 원저 혹은 완역본을 제대로 읽은 이 몇이나 되는 모르겠다만, 암튼 그 방대한 전 6권짜리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대작을 썼다는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뭔지 모르겠지만 저 묵직 대작에서 상당한 풍모를 자랑할 법한 그런 폼새를 상상하지 않겠는가?

한데 저 분이 기번이시랜다.

대단한 학자 풍모를 기대한 사람들한테는 대단한 실망을 안겨줄 지도 모르는 외모 되시겠다.

옥동자? 

한데 저 몰골 사연이 좀 있다.

1737년 5월 8일 런던 외곽 녹음이 우거진 마을 퍼트니Putney라는 데서 태어난 이 양반은 연약하고 병약하며 뼈만 앙상한, 아이라기보다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태어났다.

당시 의료 수준 고려할 때 이 정도면 곧 죽겠지 하고 부모조차 희망을 포기할 만도 하다.

그에게는 일곱 형제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살아 남아 어른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열병과 발작으로 고통을 점철한 삶을 견뎌냈다.

하지만 행동에 부적합하게 만든 바로 그 질병들이 그를 내면으로, 책 속으로, 고독 속으로, 그리고 광활하고 메아리치는 역사의 전당으로 이끌었다.

그는 훗날 학문과의 첫 만남에 대해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I sighed as a lover"라고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상상력은 이미 서리Surrey의 축축한 들판에서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고대 로마의 원로원에 앉아 군단과 함께 행진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영국 지성의 요람이라 불리는 옥스퍼드로 갔다. 그곳의 공기는 신학으로 가득했고 교수들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 역사 저작물

 
기번은 훗날 그곳을 "게으름의 학교school of idleness"라고 묘사했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단 한 가지 행동을 덜커덩 저질렀다.

바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 버린 것이다.

그 처벌은 신속하고도 철저했다.

스위스 로잔으로 추방된 그는 칼뱅주의 목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음,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가장 반 가톨릭적인 칼벵주의 목사한테 보호를 받다니...적의 적은 동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아는 기번을 만들어낸다.

런던의 번잡함과 옥스퍼드의 은둔적인 어리석음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에 푹 빠져 촛불 아래 몽테스키외 책을 읽으며 영국인이 아닌 계몽주의 사상가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몇 년 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펜에 칼을 숨겨둔 채였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런던이 아닌 로마에서 떠올랐다.

1764년 10월 어느 저녁, 무너져가는 포럼에 카푸친 수도사들Capuchin monks이 울리는 종소리가 퍼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시 세속주의 독신이자 하급 국회의원이던 기번은 고대 카피톨리누스 폐허 한가운데 서서 향수가 아닌 목적의식을 느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썼다.

"10월 15일, 로마의 폐허 한가운데 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도시의 쇠퇴와 몰락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작업에 착수했다.

20년이 넘게 그는 서재에서 일하며 로마 제국 쇠망사 6권을 집필했다.

그 작품은 엄청난 규모였다.

이 책에서 그는 안토니누스의 황금기부터 콘스탄티노플 약탈까지 로마의 위대한 제국이 서서히, 위엄 있게 붕괴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학문과 비웃음, 철학과 서사를 융합했는데,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균형 잡힌 산문으로 쓰여진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기번의 가장 큰 반란은 로마의 몰락이 외세의 침략만이 아니라 내적 부패, 즉 시민적 미덕의 상실, 독재에 의해 억압된 자유, 그리고 미신의 만연이라는 주장이었다.

특히 기독교 부패를 맹공했다.

그의 글은 큰 소동을 일으켰고, 사제들은 그를 비난했다. 대학들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글 한 마디 한 마디를 탐독했다.

그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들고자 했다.

그는 한때 "역사는 인류의 범죄, 어리석음, 그리고 불행을 기록한 기록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번은 그 기록에서 흔들림 없는 명쾌함을 보여주었다.

1794년, 유럽 전체가 혁명으로 들끓고 혼돈으로 치닫던 시기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결론 중 많은 부분, 특히 기독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더 이상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의 걸작은 여전히 건재하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학문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명쾌하고 끈질기며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도 스릴 넘치는 서사적 작품으로 남아 있다.

기번은 제국의 몰락을 기록했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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