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중기 송나라 사신단 일원으로 와서 개경을 둘러보고선 그 귀국 보고서로 완성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 증언하는 당시 고려사회 단면이다.
아 물론 이것이 당시의 실상은 백퍼 완벽히 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암튼 그 제3권 성읍城邑 편에서 채록한 방시坊市 논급 전문이다.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ㆍ‘광덕廣德’ㆍ‘흥선興善’ㆍ‘통상通商’ㆍ‘존신存信’ㆍ‘자양資養’ㆍ‘효의孝義’ㆍ‘행손行遜’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시장 거리나 민가는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뿐이다.
王城本無坊市。惟自廣化門至府及館。皆爲長廊以蔽民居。時於廊間。榜其坊門。曰永通。曰廣德。曰興善。曰通商。曰存信。曰資養。曰孝義。曰行遜。其中實無街衢市井。至有斷崖絶壁。蓁莽繁蕪。荒墟不治之地。特外示觀美耳。
간단히 말해 당시 고려 도읍 개경에는 시장이 없었다는 말이다!
저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무역貿易이라는 항목 기술이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는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록 하려고 힘쓴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한 것이지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高麗故事。每人使至。則聚爲大市。羅列百貨。丹漆繒帛。皆務華好。而金銀器用。悉王府之 _013b物。及時鋪陳。蓋非其俗然也。崇寧大觀。使者猶及見之。今則不然。蓋其俗無居肆。惟以日中爲虛。男女老幼官吏工技。各以其所有。用以交易。無泉貨之法。惟紵布銀鉼。以准其直。至日用微物。不及疋兩者。則以米計錙銖而償之。然民久安其俗。自以爲便也。中間 朝廷賜予錢寶。今皆藏之府庫。時出以示。官屬傳玩焉。
같은 맥락이다. 수도라는 데서도 상설시장이 없어 중국 사신단이 올 때 잠깐 열릴 뿐이며, 기타 일상생활은 장시가 없으니 교역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이 전부 물물교환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저 고려 시대야 은병이니 저포니 하는 준 화폐라도 썼지 조선시대로 오면? 말짱 꽝이다.
저 교역도 물물교환이라 알음알음할 뿐이다.
고려시대가 저랬으니 조선시대도 저랬을 것이다?
물론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근간에서 조선 경제 체질이 달라진 것이 눈꼽만큼도 없으니 다른 바 없다 봐도 무방하다.
정도전이 한양을 만들 때 시장을 빠뜨려?
빠뜨린 게 아니라 아예 필요가 없어 구상 자체가 없었다!
고려를 배경 삼은 드라마나 영화 보면 외국 물산이 넘치고 아랍 상인도 보이잖아?
회회아비가 손목도 쥐어주고?
다 개뻥이었다.
'역사문화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장 없는 귀신 왕조] (5-총결) 봄날 신기루 같은 오일장의 추억 (0) | 2026.07.29 |
|---|---|
| 대장장이가 재현한 전설적인 '울프베르트Ulfberht' 바이킹 검 (0) | 2026.07.29 |
| [시장 없는 귀신 왕조] (3) 넘쳐나는 책 도둑, 내사본에 환장하고 손목 나갈 때까지 열라 베끼는 조선 사회 (0) | 2026.07.29 |
| [시장 없는 귀신 왕조] (2) 마트 다녀왔단 말이 없는 신이한 왕조 (0) | 2026.07.29 |
| [시장 없는 귀신 왕조] (1) 조선왕조 신도읍 한양을 둘러싼 최대 미스터리! (0) | 2026.07.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