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10월, 이탈리아 고고학자 아메데오 마이우리Amedeo Maiuri는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 발굴 현장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바로 정교하게 조각한 작은 상아 여성상이었는데, 거의 확실히 인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 폼페이 락슈미Pompeii Lakshmi 또는 폼페이 야크시Pompeii Yakshi로 알려진 이 유물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만들었지만, 베수비오 화산 화산재 아래 묻혀 로마 세계 중심부까지 오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힌두교 행운의 여신 락슈미를 묘사한 것인지, 아니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자연의 정령 야크시를 묘사한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 조각상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고대 세계 최고의 문명 두 곳을 잇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연결고리이자, 고대 인도에서 가장 강력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제국 중 하나인 사타바하나Satavahana 왕조가 유지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이 유물은 사타바하나 시대에 인도에서 제작되었지만, 어떤 학자도 특정 공방이나 정치적 후원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발견은 로마와 사타바하나 왕국 간 활발한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고고학자 H. D. 산칼리아Sankalia는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 주 콜하푸르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중 로마 시대 청동 포세이돈 조각상을 발견했다.
포세이돈은 로마 세계 전역에서 숭배되었지만, 이 브라마푸리 조각상이 인도에서 종교적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인도에서 이 조각상은 단순히 교역품이거나 상인 소유물, 또는 부유한 가정에 전시되는 장식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데칸 지역에 조직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이 두 유물은 유라시아 전역의 광대한 지역을 연결한 인도양 무역과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문화와 종교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300년 사이, 불교 승려와 비구니들은 남아시아 안팎 수많은 무역로를 이용해 불교 전통을 전파했다.
팔리 경전을 구성하는 불교 경전들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를 시작으로 이 시기에 점차 문헌 형태로 편찬하고 보존했다.
팔리 경전은 주로 사성제와 팔정도 등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담은 불교 경전 모음집이다.[이른바 아함 계열 남방불교 결집이라 봐야 한다.]
서인도 사타바하나 왕조와 북인도 쿠샨 왕조Kushans는 두 문명에 속한 다른 종교 집단들과 더불어 여러 불교 공동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다양한 재정 지원 덕분에 불교 승려와 비구니들은 남아시아 전역에 순례지, 사원, 교육 기관을 건립할 수 있었다.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아쇼카Ashoka 황제 비문은 주로 지역 프라크리트어Prakrit languages로 작성되었으며, 이는 프라크리트어가 중요한 행정 및 문학 언어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사타바하나 왕조 또한 프라크리트어를 주로 사용한 마지막 대규모 왕국이기도 했다.

사타바하나 왕국의 행정 체계
아쇼카 황제는 황실 비문을 통해 프라크리트어 공식 사용을 장려했다.
이러한 행정적 조치는 사타바하나 왕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구전 전통으로 이어지는 유산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아쇼카 황제가 서거한 직후, 그가 남아시아 강대국으로 통치한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에서 멸망했다.
결국 인도 아대륙 전역에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여러 지역 강대국이 등장했다.
서기 1세기경에는 쿠샨 왕조가 북인도 대부분을 지배했고, 사타바하나 왕조는 데칸 고원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무카Simuka를 사타바하나 왕조의 창건자로 본다.
시무카는 재위 기간 동안 지역 강대국이던 사타바하나 왕국을 남인도 역사에 수 세기 동안 영향을 미친 고대 데칸 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왕국은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유지하면서도 지방 자치를 보장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왕조 통치 기간 내내 왕이 최고 권력을 쥐었지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아하라Ahara라고 일컫는 행정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
지방 관리들은 왕국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왕의 통치를 보좌하며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도왔다.
이 지방 관리들은 데칸 고원의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왕국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 행정 체계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안정을 유지하고 무역과 문화 교류를 촉진했다.
왕국의 주요 수입원은 토지세였다.

무역과 함께 발전한 경제 상황
사타바하나 왕조 시대는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많은 산업화 이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동안 농업이 경제 근간이었다.
이 왕조 전성기에는 무역과 상업이 크게 번성했다.
왕국은 광범위한 내륙 및 해상 무역망, 특히 로마 제국과의 무역 관계 덕분에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납, 구리, 은으로 만든 사타바하나 화폐는 데칸 고원과 인근 지역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홍해에서 호르무즈 해협에 이르는 수많은 교역 상대국과의 무역을 위해 인도 서해안으로의 접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치품이 귀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더 일상적인 인도산 상품들도 사람들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많은 양의 인도산 향신료와 쌀이 로마 의약품에 사용되었다.
로마 작가이자 박물학자인 大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로마가 향신료, 방향제, 진주, 직물과 같은 사치품을 인도와 동방에서 수입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고 기록했다.
예를 들어 계피는 소화를 돕거나 수면을 유도하는 데 사용되어 귀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 구취 제거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나라, 로마 제국, 파르티아 제국(후에 사산 왕조)과 같은 주요 강대국과의 해외 무역 덕분에 로마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이 왕국은 불교 후원이나 훌륭한 건축물 건설과 같은 문화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이는 정부의 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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