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으로는 권력투쟁에 밀려서라고 말하지만, 그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거니와. 솔까 난봉질 일삼다가 쫓겨났을 수도 있는데 어떻든 주몽朱蒙 혹은 추모鄒牟는 더는 동부여 땅에서는 버틸 수 없어 결국 남쪽으로 줄행랑을 치게 된다.
고구려 건국신화는 이 도망 또한 장대하게 그려내거니와, 여러 번 말했듯이 저 광개토왕비는 이 건국신화에도 손을 대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거나 쪽팔리다 해서 일부러 그 내막을 감춘 반면, 그 남행南行을 추모의 위대한 자발적 결단이었다는 전제를 깐다.
이 도망길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솔까 그때 본국에서 용납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추모가 몇 명이나 데리고 내려왔겠는가?
이 대목 삼국사기 증언을 당연히 봐야 하는데, 물론 삼국사기도 그 본래하는 창안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 관련 논술들을 추렸거니와
아무튼 이에 의하면 추모가 처음 도망내려올 적에 데리고 온 졸개라 해 봐야 여섯 밖에 되지 않으니, 이 여섯도 실은 두 부류로 갈라져서
첫번째가 원조 멤버들이라 동부여서부터 따라붙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가 그들이며,
나머지 셋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모둔곡毛屯谷이라는 데서 만난 합류한 셋이 있으니 이 대목 동명성왕본기 기술은 다음과 같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니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고 하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고 하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했을 뿐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무리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결국 고구려 개국공신은 동부여 출신 셋과 도망길에 합류한 셋을 합친 여섯이다.
이 여섯과 합세해 고구려라는 나라 기틀을 열었으니, 꼭 여섯이겠는가?
암튼 저런 삼국사기 기술이 실제 역사상에 부합할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이는 여타 비슷한 사례가 무수하게 증언하거니와, 동네 양아치 몇 명과 나라를 연 한 고조 유방의 사례가 우뚝하게 증언한다.
이런 내용이 비문에서는 쏙 빠졌으니, 간명함을 추구해야 하는 압축성 문장이 필요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라 본다.
문제는 그 다음.
도망친 추모 일행이 정착해 처음으로 고구려 기틀을 마련한 데를 삼국사기와 비문이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거의 일치한다.
즉, 동명왕본기에서는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그곳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운 데다 산하山河가 험하고 단단해 이곳에 도읍하려 했다가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 반면, 비문에서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했다.
졸본천과 비류곡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지역임이 명백하나, 그 거리가 멀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아무튼 비문에서 말하는 비류곡이 삼국사기를 버무릴 때 비류수沸流水라는 강이 흘러가면서 만든 계곡 지대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애초 나라를 열었을 적에 그 꼴이 말도 아니었다. 뭐 저때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정하고 운운했지만, 천만에. 무슨 여섯 명으로 나머지 현지주민들을 규합해 오늘부터 우린 하나다!고 선언한 일이 건국이겠는가?
그럼에도 저렇게 쪽박으로 시작한 고구려가 급성장을 거듭한 것만은 분명해서 동명왕본기를 보면 저보다 4년이 지난 시점(B.C. 34) 가을 7월에 벌써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성곽과 궁실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것이겠는가? 아담 사이즈로 흉내만 냈다고 보면 대과가 없다.
이때 성곽과 궁실을 지은 데가 어디인지 본기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틀림없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눈여겨 본 졸본천 가였을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졸개 몇 명이랑 고구려가 원두막 지어 애초 터잡은 데는 비류수 가이며, 이에서 조금 힘을 키워 초기 왕도 혹은 왕궁으로 확정 정착한 데가 졸본천 가였다.
한데 이런 일련하는 흐름을 비문은 전면으로 배신하며 전연 엉뚱한 이야기를 일삼는다.
그 도읍한 데를 이르기를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고 했거니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역사조작이다.
어떤 미친 놈이 물도 구하기 힘든 산 위에다가 도읍을 세운단 말인가?
고고학적 상식은 고고학에 소양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비하는 상식이 아니다. 생존본능이 바로 고고학적 상식이다.
그래 어떤 미친 놈이 산꼭대기에다 도읍을 정하고 거기다 궁실을 짓고 왕 노릇한단 말인가?
흔히 고구려 업계에서 하는 말로 저 홀본 서쪽 산을 오녀산성이라 하거니와, 그래 너 같음 그런 험준한 산 꼭대기에다 도읍 정하고, 궁실 짓겠니? 물은 어디서 구해?
물이 난다고?
그래 물이 나는 곳이야 물론 있겠지.
그럼 거기서 매일 아침 주전자로 물 받아와서 밥 하고 세수하고, 가끔 샤워도 하고 그래?
순서는? 왕과 왕비 먼저하고 나머지 쫄개들은 기다려서?
엄동설한엔 뭘 우째야는데? 군불 때고 고구마나 구워 먹어? 고구마도 없고 강냉이도 없는데?
물론 아주 극단하는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자고로 도읍은 물가에 세우기 마련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그 물은 상시로 구할 수 있는 데라야만 한다.
저런 산성에서 깔짝깔짝 옹달샘 수준으로는 택도 없다.
이걸 추모라고 몰랐겠는가?
이것이 바로 고고학적 상식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체화한 생존 본능이다.
산상에 성을 쌓고 궁실을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말은 명백히 조작이다.
이런 조작도 모르고 진짜로 고구려가 처음 건국한 데가 오녀산성 같은 산성이라는 망발이 고구려 업계에 판을 친다.
왜? 저 비문이 고구려 사람이 남긴 직접 증언이라 해서 이른바 사료 가치가 아주 크다는 이유 말고는 없다.
넌 믿니? 저런 망발을? 그게 역사학도고 그게 사료비판이야?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그 도읍지 선정과 그 위치는 비문을 버려야 한다. 삼국사기가 옳다!
이에서 일어나는 의문.
그렇다면 왜 비문을 저리 처리했는가?
비류수 가에서 원두막 짓고서 나라를 건국했다면? 쪽팔리잖아?
궁실도 없었다면? 쪽팔리잖아?
그래서?
하늘과 가까운 산상으로 올려다 놓았을 뿐이다.
비문에서 말하는 저 홀본 서쪽 산꼭대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딱 올림포스 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 하늘에, 더구나 툭하면 구름이 일어 덮이는 그런 산상이라면 폼 나지 않는가?
더구나 주몽은 천제의 손자라며? 하늘과 가까워야지 않겠는가?
그래서 죽음도 용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했잖아?
상여 타고 지하로 간 시체를 용 가마 태워 하늘로 보냈자나?
문제는 그런 산상은 상상에서나 폼 나지, 실생활은 전연 달라 사람이 도저히 살 곳이 아니라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너가 오녀산성 같은 데서 살아봐라! 사흘도 채우지 못하고 아래로 기어내려왔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호태왕비문은 아무말 대잔치요 그네들 마스테베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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