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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인도 사회의 열녀 전통 사띠(Sati)를 어찌 볼 것인가?

by taeshik.kim 201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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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고병리학연구실 신동훈 교수가 몇 차례 연재를 했거니와, 그에 대해 다시 명실상부한 정통 인도학 연구자인 김용준 선생이 아래 훌륭한 보완을 해 주었으니, 이는 이 블로그에 이미 게재했다. 

https://historylibrary.net/entry/Sati

 

인도사회와 Sati(사티)

인용자注 : 인더스문명 부부합장묘 발굴과 관련한 인도사회 여성들의 남자 따라죽기(혹은 따라죽임)인 순장殉葬 혹은 순사殉死인 사티(sati) 관련 서울대 해부학교실 신동훈 교수의 연재에 대해 인도 현지에서 오..

historylibrary.net

이것으로써 조금은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김용준 박사가 다음과 같이 수정 보완한 글을 보내줬다. 

◇◇◇◇

사띠(Sati)는 수행자 쉬바(Shiva)와의 결혼에 반대한 아버지에 저항하기 위해 불에 뛰어든 사띠라는 여인 이름을 딴 것입니다. 쉬바는 파괴의 신답게 분노의 아이콘으로 자주 묘사되는데요, 이 전설은 그 중 하나입니다. 

사띠(사티)는 변 사또에게 굴하지 않은 춘향이처럼 전근대 인도의 바람직한 여성 정조상을 대표하는 이름이 됩니다. 또한 과부가 죽은 남편과 함께 혹은 그 이후 화장되는 명예자살(혹은 사회적 타살) 풍습을 그의 자살시위 에피소드와 연관지어 사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속한 사카(Sakya) 왕국에 브라민 관료들이 있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즉 브라민교는 대략 기원전 15세기경부터 북인도 지역에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많은 연구자가 생각합니다. 그들의 윤리관 및 사회관이 반영된 관습법전 편찬도 기원 이전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이 인도 사회에 의미 있는 수준으로 정착된 것은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사띠는 카스트제를 포함한 브라만교적 사회윤리가 제법 굳건한 뿌리를 내린 굽타 시대 이후(5세기 이후) 왕가 혹은 높은 무인 가문 집안에서 처음 행해졌다가 이후 확산됐다고 알려졌습다.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더불어 인도 국민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는 라마(Rama)의 이상적 군주로서의 행적, 인품 등의 묘사와 더불어 그의 아내 시타(Sita)를 통해 여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석구석 담고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결백과 정조를 증명하기 위해 불에 뛰어드는 장면입니다. 뭐 말 돌릴 필요 없이 딴 남자한테 납치되었다가 강간당한 적 없느냐는 군중재판 혹은 남편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띠(Sati)와 시타(Sita)의 불나방 같은 행위는 과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아내된 여성은 남편을 위해 불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는 규범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과부에 대한 전근대사회의 사회적 편견과 멸시는 인도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인도의 경우 일단 사띠보다는 열녀촌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과부의 일반적인 삶이었습니다. 바라나시 등에 유명한 과부촌이 있습니다. 
 
과부촌에 가느니, 스스로 사띠를 결정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 속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지요. 인도 종교 전통들에서의 출가의 의미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들은 잘 아시는 인도의 화장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들이니까요. 

출가 자체가 죽음이라 집을 가출하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바라나시에서 구걸하는 적지 않은 나이 든 여성들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좀 짠해서 이 분들 구역 지나칠 때는 저도 돈을 좀 기부하는 편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이 있기에 사띠의 결정은 명예자살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타살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여성들은 힌두 사원들에서 기생 생활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데브다시(Devdasi), 신의 여성)이라고 하는데요, 사원의 하녀 혹은 기생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들을 이해해야 유명한 카쥬라호 사원의 성교 조각들이나 카마수트라 문헌, 인도 밀교의 성교수행을 이해할 수 있죠. 

출신이 높은 과부 중에는 우리의 황진이 같은 분도 있었습니다. 엄격한 브라만교 관습에 반대편의 스탠스를 취한 불교 및 자인교를 후원한 기생이 많았던 것도 기억해 둘만 합니다. 

종종 인도 여신 전통을 예로 들면서 전근대 인도가 여성 존중 사회였었다는 논지를 펴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는 마리아의 존재를 들며 전근대 기독교가 여성존중의 사회였다는 논리와 비슷한 비역사적 고찰입니다. 

여신 전통은 대체로 부족의 모계제 사회 및 신앙이 흡수되는 과정과 연관이 있고요, 전근대 인도의 메이저 종교 및 관련 관습은 가부장제 사회를 철저히 옹호하고 과부 및 하위카스트 여성을 사원에서 노골적으로 착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원의 하녀 및 기생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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