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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고분2

낙랑 목관으로 제작한 후지츠카 도장 과천 추사박물관이 개최 중인 후지츠카藤塚와 난학蘭學 특별전 출품작 중에는 추사학을 개척한 원훈대신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유품으로 다량의 인장印章 도장이 인장함과 함께 선보이거니와, 개중 이채로운 것으로 평양 일대 이른바 낙랑 무덤에서 출토한 나무널 목관木棺을 재가공한 인장이다. 인장함 뚜껑에는 ‘잠천인니潜泉印泥, 상해 서랭인사제上海 西冷印社製'라는 글을 새겼다. 등총장인藤塚藏印, 곧 후지츠카 소장 이라는 의미를 지닌 도장 측면에는 ‘낙랑고분의 관조각이 실로 2천년이 지났는데, 채칠彩漆이 오늘날 더 선명하니 진실로 천하의 보배이다. 정축년(1937) 새해 아침에 전각칼로 새기다. 口田竿良이 소헌선생께 드리니 간직해 주십시오. [樂浪古墳棺片星零食二千季, 彩漆今猶鮮誠天下珍也. 丁丑元旦試銭刀, 口田竿良 素軒先生.. 2023. 7. 15.
식민지 시절, 재在평양 일본인들의 취미 1910~20년대, 평양 일대에 산재해있던 낙랑樂浪 고분 열에 아홉은 도굴꾼의 곡괭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시절 도굴의 열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평양에 살던 일본인이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편집자補 *** 도굴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근자 중국에서 발견 발굴된 조조 무덤의 경우, 삼국지 그의 본기를 보면 죽으면서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말고 편평하게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라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도굴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한반도라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아니해서 왕릉이 문종 이후인가? 회격묘 일색으로 변하고, 이른바 후장厚葬에서 박장薄葬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도굴에..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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