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도굴22 2개 대규모 도굴단이 덮친 초국왕 무덤 무왕돈묘武王墩墓 이번 발굴에서 천 건을 상회하는 칠목기漆木器 청동기青铜器 문물을 수습했으니, 개중 칠목기는 종류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주묘主墓(一号墓) 동1실东Ⅰ室 남단에 둔 대정大鼎은 초보 측량결과 구경口径 88센티미터를 넘어 안휘박물관安徽博物院 소장 “진원지보镇院之宝” 초대정楚大鼎보다 크다. 이 외에도 매핵梅核·과자栗子·첨과자甜瓜子 등 과소果蔬가 수습됐다. 하지만 2020년 구제 발굴이 실시되기 전엔 무왕돈묘武王墩墓는 여러 차례 도굴에 노출되고 그런 일들이 매장 환경에 해를 끼치고 문물 안정에도 해를 끼치게 되었다. “모금교위摸金校尉” 사건 무왕돈묘武王墩墓는 회남시淮南市 산남신구山南新区 삼화향三和乡 서와촌徐洼村 남쪽 약 150미터 지점이라 1981년 안휘성중점문물보호단위安徽省重点文物保护单位가 됐다. 이 무덤은.. 2024. 4. 20. [開者即死] (2) 아홉살 수나라 황실 근친 여아의 죽음 개자즉사開者即死, 곧 열면 뒤진다는 무덤은 1957년 중국 서안성西安城 서쪽 양가장梁家庄 부근 한 공사장, 지금의 서안시西安市 옥상문玉祥门 밖 서대가西大街 남쪽 약 50미터 지점에서 발견됐다. 발굴조사는 중국과학원고고연구소中国科学院考古研究所가 했다. 조사 결과 무덤에서 무덤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묘지墓志가 발견되어 주인이 드러났으니, 이름은 이정훈李静訓, 남자 이름 같지만 여자라, 죽을 때 불과 아홉살 여아이며 수나라 황실 근친으로 수隋나라 대업大业 4년, 서기 608년에 죽은 것으로 드러났다. 남북 장축인 묘실墓室은 긴 네모꼴 모양으로 땅을 파고 내려가 묘광墓壙을 마련한 장방형 수정갱竖井坑이며, 깊이는 2.9m. 묘실 남쪽에다가 밖에서 안쪽으로 향해 깊이 내려가는 형식의 통로인 사파형 묘도斜坡型墓.. 2024. 4. 5. 도굴에 분개한 이마니시 류 금서룡 일제의 역사침략 나팔수로 온갖 욕을 얻어먹는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 금서룡 今西龍(1875-1931)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 그조차도, 가히 '대난굴시대'라 할 만한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의 도굴행위에는 학을 떼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조사보고서 류의 글은 건조하게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1917년 그가 구미 선산 일대 고분을 조사하고 올린 보고서는 온갖 감정이 섞여서 나타난다. 그 중 한 꼭지를 보면...(옛날 일본어라 때려맞춰가며 읽어본 것이라 분명 잘못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대략 이런 뜻이겠거니 하고 봐주시기 바라며, 제대로 된 번역을 기대한다) "이런 고분군 중에 대부분은 묘광이 이런 상태로 노출되어있는데, 봉토가 사라져 묘광이 노출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유물을 건드리거나 들어가지 않는 .. 2023. 10. 22. 10미터 지하에 쳐박은 흉노 무덤, 그래도 도굴은 피하지 못했다 이런 흉노무덤은 깊이가 10미터 안팎인데 예외없이 도굴됐다. 내가 연전에 몽골 노용 올(노인 울라) 현장을 둘러보니 얕은 봉분이 예외없이 있다. 나는 이 표식이 도굴을 불렀다고 본다. 나 여기 있으니 도굴하라는 안내판에 다름 아니다. 저런 무덤 만들기도 지랄 같지만 도굴하기도 더 지랄 같다. 도굴하다 심심찮게 매몰사고 나서 죽었을 법한데 아직 그런 흔적 찾았다는 보고는 없다. 도굴이 가능했던 이유는 보물을 묻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흉노를 뭉갠 오환이 흉노무덤을 다 팠다는데 이들이 도굴 주범 중 한 명이다. 물론 이후에도 간단없는 도굴이 있었다. 이 도굴이 두려워 칭기스칸은 유언으로 아예 봉분 흔적조차 없애버리고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게 한다. 위 무제 조조 역시 이런 방식을 썼다가 근자에 그 무덤이.. 2023. 5. 1. 식민지 시절, 재在평양 일본인들의 취미 1910~20년대, 평양 일대에 산재해있던 낙랑樂浪 고분 열에 아홉은 도굴꾼의 곡괭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시절 도굴의 열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평양에 살던 일본인이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편집자補 *** 도굴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근자 중국에서 발견 발굴된 조조 무덤의 경우, 삼국지 그의 본기를 보면 죽으면서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말고 편평하게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라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도굴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한반도라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아니해서 왕릉이 문종 이후인가? 회격묘 일색으로 변하고, 이른바 후장厚葬에서 박장薄葬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도굴에.. 2022. 11. 11. 도굴당하고 복구하고, 기구한 무덤의 팔자, 이규보가 증언하는 도굴 존경하는 페친인 김 모 선생님께서 일찍이 고려 왕릉의 도굴상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에도 고려 중기 왕릉의 도굴과 관련되는 자료가 나타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요조하신 현비賢妃의 옥체를 매장한 지 겨우 1백 년이 지났는데, 천유穿窬의 소도小盜가 금품을 훔쳐 냄이 구천九泉에까지 미쳤나이다. 이에 위태롭고 두려운 생각이 겹쳐 완전한 수리로 복구하기를 도모하고, 먼저 정성의 제물祭物을 베푸오니 밝게 들으시기를 우러러 아룁니다. 간릉簡陵이라는 능을 수리하기 위해 태묘와 경령전에 알리는告諭 글이다. 에서는 간릉을 산직장상散職將相 둘이 지키는 능 중 하나로 언급할 뿐 주인을 알 길이 없는데, 여기서 그 주인을 '현비'라고 한 걸 보면 문종의 비인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가 아닐는지? '천유'라는 표현을.. 2021. 7. 3.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