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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국2

신라의 결단, 백제 구원병 1만의 무게감 475년 백제가 실상 고구려에 멸망하고 개로왕까지 사로잡혀 참수된 참혹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간과한 중차대한 사실이 있으니 이 난국에서 신라가 취한 자세다. 왕도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을 알리면서 구원병을 청한 백제 문주한테 신라와 자비마립간은 물경 1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했다. 이 1만이 주는 무게감을 아무도 심각히 보지 않았다.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에 이르기까지 삼국이 총력전 체제에서 동원가능한 군발이 숫자는 3만~5만 명이었다. 일통삼한 전쟁 와중에 신라가 전국에서 징발한 군발이는 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것도 보급부대까지 합친 규모다. 장수왕이 개로왕 목을 딸 때 동원한 군대도 3만이었다. 저 무렵 삼국 공히 국가 명운을 건 전쟁에 동원 가능한 숫자는 삼만이 최고였다. 광개토 담덕가 5만을 동원.. 2023. 5. 5.
신라가 세운 문주, 부용국으로 전락한 백제 백제는 두 번 멸망했으니 1차 멸망은 475년에 있었다. 이때 백제는 왕도를 한성漢城에 두고 있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 시점 이전까지 대략 500년 백제를 떼어내 한성백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들을 멸망으로 이끈 이는 고구려였으며, 당시 왕은 장수였다. 광개토왕 담덕 아들인 장수왕은 재위한지 이미 63년이 되는 해에 3만 대군을 일으켜 백제 왕도로 진격했으니, 그가 왕위에 즉위한 때가 대략 18세 무렵이니, 이때 이미 팔순 상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백제를 철천지원수로 여겼던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것도 겨울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말이다. 이 사건이 정작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그의 재위년도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혔거니와 9월에 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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