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송시열9 이른바 인플루언서 Influencers, 조선시대 산림山林의 직접 계승자들 조선시대 산림山林의 실체를 알고 싶으면 요새는 페북을 비롯한 sns를 보면 된다. 우째 그리 정치를 잘 아는지 이른바 재야에서, 이른바 산림에서 다들 훈수둔다 정신이 사납다. 조선시대 산림이 꼭 저랬다. 사사건건 정치는 이래야 한다 지도자는 이런 인재를 쓰야 한다 이른바 재야에서, 이른바 산림에서 훈수두기 바빴다. 요새는 그 무대가 페이스북과 같은 sns라는 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안 되겠다 정권 잡아 갈아엎어야 겠다고 직접 출마를 선언한다. 초반엔 좀 당했는데 그러다 기어이 정권을 장악했다. 잡고 나서 한 일이 식칼 휘두르기였다. 미친X 널 뛰듯 작두 흔들어제꼈다. 우리를 반대한 것들은 쏵다 적폐라며 갈아엎었다. 인왕산 종소리가 외래 귀신 부처를 섬긴다며 절을 없앴고 어디 시건방지게 제후가 하늘을 .. 2023. 4. 19. 유족이 다 쓰나 교감자 이름으로 남는 행장行狀 혹은 시장諡狀, 때론 사생결단을 부르다 자고로 행장行狀이니 시장諡狀이니 해서 죽은 사람 행적을 정리한 글은 초고와 완성본이 따로 있어, 초고는 대개 그 아들이나 손자 같은 직계 후손이 쓰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대개 그 시대 글이 뛰어나다고 간주하는 사람이 감수를 보아 완성한다. 물론 이런 행장이나 시장은 이 감수를 한 사람이 저자로 남는다. 대개 행장이나 시장은 유족이 써 준대로 최대한 살려주되, 그에다가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을 적절히 버무리고 보태어 완성하게 되니, 이 유족이 써 준 원고를 지 맘대로 고쳤다가 원수까지 지게 되어 나중에는 사생결단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으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이 그 대표라 할 만하다. 둘은 본래 사제지간이라, 그 아버지 윤선거尹宣擧(161.. 2023. 4. 9. 아버지 장송도 하기 전에 장가 간 화원 김명국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이 많을 줄로 알지만, 그를 빼놓고 조선 중~후기 역사를 논할 수 있을까? 이는 정치사나 학술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남긴 글을 읽어보면 여러 방면에 걸친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다. 권33에 실린 편지 한 통도 그에 속한다. 1659년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에게 보낸 글이다. 이때 송시열은 이조판서(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장관?)였고 유계는 병조참지(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국장?)였다. ... 또 한 가지 일이 있네. 저번에, “북부北部에 윤리倫理를 거스른 사람이 있는데도 부관部官이 적발하여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라 한 말을 듣고, 그 허실虛實을 .. 2022. 7. 17. [충주답사] 잊지못할 수암 권상하 묘소 2022.5.28.(토) 권상하 묘소 다른 답사지 일정을 소화하느라 늦게 권상하묘소에 도착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권상하 묘소를 찾아 가기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우선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는 저로서는 네비게이션에 검색했을 때, 위치정보가 나오지 않으면 당황스럽습니다. 다행히 같이 간 다른 선생님께서 네비게이션에 ‘충주호관광농원’을 검색한 다음 찾아가다가 권상하묘소 푯말을 보면 그 길로 들어 오면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천천히 주행하다가 길 옆으로 저 푯말이 보이면 푯말이 가리키는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오프로드(?) 같은 흙길을 지나 차가 더이상 올라가지 못할 것 같아 우선 차를 세워두고 걷기로 했습니다. 열심히 걷다보면 또 위 사진의 표지석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300m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오.. 2022. 6. 6. 우암 송시열묘 앞에서 송시열(宋時烈) 이름만 들어도 거대하고 묵직한 바위 하나가 나의 명치를 꾸욱 누르는 것 같다. 나의 얕은 공부로 이분을 어찌 설명하리오?! 견훤산성을 답사하고, 다음 코스로 우암 송시열 묘소에 왔다. 화양구곡 안에 있는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모시는 사당)•화양서원(華陽書院) 외 우암의 흔적들을 같이 보면 좋겠지만, 시간 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로 했다. 사실 산성답사 중에 송시열 묘소에 간다고 해서 내심 좋았다. 최근 조선시대사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하필 주제는 ‘서원’이라 ‘송시열’ 이름만 수백 번을 듣고 또 본 것 같다. 글자로만 무수히 봤던 송시열의 실체(실체는 없지만)? 아니,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모르게 기뻤다. 나는 변태가 분명하다. 아무튼 약간의 설레임으로 그.. 2021. 11. 2. 석봉 글씨에 우암이 부친 글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제자 나양좌(1638-1710)가 어느 날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를 스승에게 가지고 왔다. 대대로 내려온 것이라면서 몇 자 발문을 적어주십사 하고 내밀었는데, 우암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준다. 석봉石峯의 글씨는 집집마다 소장되어 있었으나, 이제 와서 시대가 조금 멀어지고 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고 보니, 점차 처음처럼 흔하지 않다. 이번에 나현도羅顯道가 그의 증왕고曾王考 보덕공輔德公이 간직하였던 것을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의 선고先考 목사공牧使公이 난리를 만나 피란다니면서도, 보덕공이 보배로 여기었다 하여 늘 등에 짊어지고 다닌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되었습니다.” 하였다. 아, 그 보수保守가 여기에 이른 것은 이 어찌 조상을 애경愛敬하는 일단一.. 2021. 5. 15. 이전 1 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