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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곽묘

[발굴조사보고서] 영성위 신광수, 화협옹주묘 《영성위 신광수·화협옹주묘》 고려문화재연구원, 2019 유적은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 43-19번지 일원으로 주민인 경작중 발견한 석함 안에서 목제 말이 발견됨에 따라 주변 일대에 대한 긴급발굴조사를 시행 한 결과 조선시대 영조대왕의 공주인 화협옹주와 부군인 신광수의 묘가 확인되어 발굴조사되었다. 이 분묘는 이미 1970년대 이장된 분묘이나 주변에 매납한 유물이 들은 석함은 원 위치에 남겨진 관계로 인해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분묘의 묘제는 회곽묘로 부부가 합장된 모습이다. 묘역 바깥으로 곡장을 조성하였고, 무덤 남쪽에 석함과 회곽함이 각각 위치한다. 묘역의 규모는 길이 588cm, 너비 660cm이며 남서쪽 하단부는 이장으로 인해 결실된 모습이다. 두향은 N-62-E로 한강이 흐르는 서쪽을 바..
이 땅의 도굴꾼들에게 고하는 통신(3) 다이너마이트는 필수 나는 일전에 일갈하기를 요즘 도굴꾼들에게 공부가 부족하며, 그리하여 혁혁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도굴사 최악의 치욕들이 방방곡곡에서 빚어지고 있다고 했거니와, 그런 망신살이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 혹은 회격묘灰隔墓라는 무덤에도 미치고야 말았다. 2006.01.19 15:58:20서오릉 순창원 도굴 흔적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사적 제198호) 경내 순창원順昌園서 전문도굴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도굴 미수 현장을 발견하고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19일 밝혔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明宗의 원자元子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3)와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묘로, 문화재청에 따르면 18일 오전 발견당시 도굴범이 파낸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 뒤편이 다져..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0): 에필로그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약속한 대로 조선시대 회곽묘 관련 선행 연구를 소개한다. 아래 연구에 필자의 글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먼저 조선초기 상장의례의 변천은 정종수 선생의 중앙대 대학원 박사논문 "조선초기상장의례연구"에 자세하다. 이 논문은 회곽묘만 다룬 논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주자가례를 도입하는 과정의 논란과 변천에 대해 서술하였다. 고려시대의 석실묘가 조선시대의 회곽묘로 변천해 가는 과정도 자세히 다루었다. 정종수 선생 다음으로 회곽묘의 변천과 관련하여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김우림 선생의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를 권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 김우림 선생의 글은 회곽묘의 변천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글이었는데 이 책에 이전 주장이 알기 쉽게..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9)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의 하나는 회곽묘 구조가 처음 조선 땅에 출현했을 때와 나중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백문화재연구원 방유리 선생의 "조선시대 회격묘 출토 유물의 수습과 보존" (야외고고학 제 7호)이나 김우림 선생의 단행본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을 보면 이 부분이 비교적 자세하다. 김우림 선생 주장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대로 회곽묘를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국조오례의" 방식의 회곽묘 제작 기법. 방유리 선생의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초기 방식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묘광을 파고 그 위에 목곽-..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8)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불교식 상장례를 타파하고 주자가 정리한 주자가례를 조선의 공식적인 매장 방식으로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바닥 그 누구도 회곽묘를 실제로 만드는 방법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회곽묘에 사용한 재료. 위에 보이는 재료 중에 석회·모래·황토를 삼물三物이라 부르는데 이것으로 섞어 관 주위에 다져두면 굳어 회곽이 된다. 마사토는 무덤 주변의 생토층을 상징한다. 회곽묘는 지배계층의 대 불교 "사상투쟁" 과정 중에 채택된 묘제이므로 회곽묘는 조선 계급사회의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부터 아래로 그 유행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회곽묘는 "국조오례의"의 흉례 "치장" 편에도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국초에 이미..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7)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서 우리는 중국에서는 곤충, 나무뿌리나 도굴꾼 침범을 막고자 주자朱子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채택한 요장묘가 주자가례朱子家禮 형태로 한반도에 수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불교의식으로 점철한 고려시대 제반 장송葬送松 의례를 개혁하고자 하는 조선시대 신진사대부들이 일련의 개혁 일환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실石室 대신 주자가례에 기록된 대로 회곽묘를 도입하고자 한 것도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제는 이렇게 도입한 회곽묘가 실제 조선 역사에서 어떻게 변천하고 발전하였는지를 살펴야겠다. 조선시대 회곽묘의 발굴상황 앞에서 이야기했 듯 조선 회곽묘는 그 원류라 할 중국에서 기술적인 도입한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가 기술한 내용을 지남指南으로 삼아 그..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5)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사실 주자가 회곽묘를 창안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주자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그가 살던 중국 강남 땅에는 회곽묘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안 알려졌지만 중국쪽에도 우리와 같은 회곽묘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회곽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요장묘浇浆墓 혹은 삼합토 요장묘三合土浇浆墓라고 부른다. 이 무덤이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북송대에 속한다. 주희가 남송대 사람이므로 이 무덤은 주자가 생존하던 당시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셈이다.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역도 주희가 살던 양자강 일대로 내가 안다. 중국 쪽 자료에서 이 무덤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면 우리 회곽묘 만드는 방법과 ..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4)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 주] 오늘 글에 있는 회곽묘 명칭에 관련해서는 사실 정리가 좀 필요한 상황인데 일단은 회곽묘로 통일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추후에 명칭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조선시대 회곽묘는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우리나라 매장 전통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조선시대 들어와 모종의 이유로 우리사회에 "갑자기" 이식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회곽묘 비슷한 것이 우리나라에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 무덤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다면 어떤 무덤이 쓰였을까? 여러가지 형태의 무덤이 고려시대에도 뒤섞여 만들어 졌지만 그 중 지배계급이 즐겨 쓰던 무덤양식은 "석실묘"였다. 여주 상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