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신동훈 선생의 아티클, 곧, 조선시대 염장 생선이 왜 거의 보이지 아니한가? 이는 소금 대량 생산이 없어서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거니와, 그에 대한 토론에서 무시하기 힘든 증언들이 있어 채록해서 정리한다.
먼저 본래 전공은 신석기시대 낚시라 하지만, LH 들어가서 오만가지 고고학 관련 업무에 종사하다 모르는 것도 없는 전형하는 야부리 고고학 행정학도가 된 김충배(이 오지랖은 마침내 암것도 모르는 스포츠 분야로 확장해 국립스포츠박물관장? 뭐 이딴 자리까지 꿰차고선 지금은 스포츠인 행세까지 하는 만행을 부리더라만, 암튼 애니웨이) 선생이 이르기를
예전에 안동에서 간고등어 박물관 만든다고 해서 자문을 해준 적이 있는데[지가 왜 간고등어까지 손대?] 비스한 취지로 얘기해 준 적이 있어요. 자염은 뭍에서 만듧니다. 소량이지만 붉나무에서 채취하는 방법도 있지만.
생선 염장에 필요한 만큼의 소금생산은 천일염이 들어 온 일제 강점기 이후 가능합니다. 거의 어패류 유통은 건조 상태로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생선의 건조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아가미가 달린 대가리와 내장 부위이므로 가장 먼저 제거됩니다.
안면도 고남리의 참돔 대가리뼈들이 대량으로 발굴되는 정황은 바로 이런 어업전진기지에서의 포획활동이 내륙에서의 소비를 위한 갈무리, 즉 건조작업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당시 소금이 귀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일부 토기들은 자염에 필요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생선 염장은 근현대 산물. 그 이전은 건조."
곧, 신동훈 선생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보거니와, 저중에서 유의해야 할 대목은 안면도 고남리 참돔 대가리뼈 발굴이라, 저에 대해서는 아마 안면도 쪽에 무슨 박물관이 있는데 그쪽에 또 마수를 뻗쳤던지, 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저런 막던지기에 대해 박기영 선생은
"목염은 주로 절에서 생산..장 담은 이야기도 일본 염전 이후 방법이지요. 자염이나 목염. 바닷물로 담아서 장독 안에서 휘발시켜 염도를 맞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 담은지 3년 만에 먹는다는 말...안동 공납 언어는 훈련 은어가 아닐까?"
하는 논평이 있었으니 경청해도 좋다.
다음으로 수산학도 정석근 교수는 조금은 다른 맥락으로 읽힐 만한 논급을 덧붙이거니와 전문은 아래와 같다.
조선시대 고등어 주산지는 함길도(함경도)였는데 이미 1421년 세종 때 서울로 진상했다는 세종실록 기록이 있어요. 함경도 원산에서 서울까지 고등어 운반하는데는 적어도 5-7일 정도 걸렸는데, 이때 이미 염장을 했다는 뜻이죠.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조선 단종 2년(1454년) 완성된 《조선왕조실록》 부록.
함길도 각 행정구역 산업 기록 부분에 소금을 굽는 가마인 염분鹽盆 개수.
함흥부 (咸興府): "염분이 27개이며..." 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함흥부 길주목 (吉州牧): "염분이 27개이며..." 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안변도호부 (安邊都護府): "염분이 24개이다." 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안변도호부 경성도호부 (鏡城都護府): "염분이 21개이다."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경성도호부경원도호부 (慶源都護府): "염분이 15개이다." 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경원도호부영흥대도호부 예원군 (預原郡): "염분이 14개..." 원문 출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영흥대도호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원도 동해안 고을의 모두 염분(塩盆, 소금가마)의 개수를 기록. 강릉도호부 23, 연곡 5, 우계 20, 양양도호부 22, 동산현 18, 삼척도호부 40, 평해군 46, 울진현 61, 간성군 17, 열산(烈山) 6, 고성군 12, 안창 11, 통천군 36, 흡곡현 3
경상도 동해안 소금생산 기록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세종실록》 150권
울산군 (蔚山郡)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기록 내용: 성 안에 소금 창고인 염창(鹽倉)을 두고, 소금 생산과 유통을 감독하는 관직인 염장관(鹽場官)을 파견했다고 기록.
흥해군 (興海郡) 경상도 경주부 흥해군 기록 내용: "군인내왕자취(郡人來往煮取)"라고 기록.
기장현, 영덕현, 영해부 등 그 외 동해안 고을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1권~제24권 경상도 동해안 고을 편 (동래현, 기장현, 장기현, 영일현, 흥해군, 청하현, 영덕현, 영해도호부 등)기록 내용: 각 군현 토산 항목에 변함없이 '염(鹽)'을 지역 특산물로 나열.
18세기~19세기: 《영덕읍지》(1832년), 《영영승람》(1935년 편찬본, 조선 후기 및 근대 상황 수록) 등
토산물 조항에 해산물과 소금이 지속해서 등장합니다.
특히 영덕이나 영해 해안가에서 잡힌 고등어 그리고 여러 어류를 이 소금으로 절인 뒤 보부상을 거쳐 안동 등 내륙 산간 지역으로 공급하는 물류 경제 기반
곧, 조선시대 염장이 불가능하지 않았으며, 실제 염장을 해서 저 먼 함경도에서 서울까지 고등어를 진상했다는 맥락으로 읽힐 만한 논평을 했거니와 저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달았다,
"고등어 조달 문제에서는 계절도 생각해야 합니다. 저때 이송이 염장인가 아닌가는 계절이 중요합니다. 겨울철에는 생고등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름이 문제입니다."
이런 논제가 나오면 약방 감초격으로 내가 곧 전문가요 하고 뿅 하고 나서야 하는 국립민속박물관 김창일은 지금 이 시간 현재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디 가서 또 야부리 장사 하나 보다.

저 이송이라는 측면에서 더 놀라운 것은 노가리.
이 노가리는 말리고, 그걸로도 부족해 불로 구워버렸다.
이건 뭐 한국고고학이 다른 문제도 다 그렇지만 토기에 정신 팔려 정작 해명해야 할 논제는 모조리 입을 콱 다문 형국이라, 저 소금 문제, 특히 생선 염장 문제는 저리도 중요한데, 지들이 언제 무슨 인문학을 한 적이나 있기라도 하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뻘짓으로 일관하며 그 짓을 고고학이라 하는 판국이니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암튼 훈제와 염장은 인류 생존 문제와 직결한다.
고고학은 이런 걸 파헤치라 존재하는 학문이지 어찌 그릇 쪼가리 형식 분류하라고 있겠는가?
그건 개돼지나 줘 버려라.
간고등어가 조선시대에 있었을까?
간고등어가 조선시대에 있었을까?
흔히 간고등어로 상징되는 염장생선. 싸면서도 짭잘하던 고등어 자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소금에 절인 고등어가 많이 소비되었으리라 생각들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안동간고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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