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시사IN》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제473호
경주 복원 지휘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
지난해 작고한 김정기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을 듬뿍 받은 문화재 원로 인사이다. 그는 한국 고고학 현장에 처음으로 실측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석굴암·불국사 등 주요 문화재 복원을 진두지휘했다.
지난해 8월26일 저녁 7시30분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한 주택에서 한 노인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향년 85세. 그는 ‘한국 문화재 부문의 박정희’라고 불려 마땅한 인물이었다. 철권통치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쩌면 평범한 고고학도요 고건축학자에 지나지 않을 그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노골적으로 챙길 정도였다. 그도 이 같은 박정희의 ‘애정’에 충분히 보응했다. 이 고고학도이자 고건축학도는, 10·26 이후에도 박정희를 회고할 때마다 ‘각하’라는 호칭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창산(昌山) 김정기다.
박정희만큼 논란이 많은 한국 현대사 인물이 또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라는 이름만 나와도 흥분하기 일쑤다. 그런데 고고학계에서 저세상에 갈 때까지 박정희를 ‘각하’로 불렀던 김정기를 비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어떻게 보면 좀 기이한 일이다.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미 고인이 되어 박정희를 따라갔으되, 김정기는 문자 그대로 거목(巨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문화재 현장은 없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 복원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김정기다. 불국사 역시 그가 만든 ‘작품’이다. 경주 하면 떠오르는 여러 고고학 유적들, 예컨대 황룡사 터나 안압지,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한 총책임자 역시 김정기였다.
ⓒ연합뉴스 2013년 2월14일 숭례문 복원 현장에서 김정기 박사(왼쪽)가 복원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해 8월26일 세상을 떠났다. |
김정기의 손길이 미친 곳은 경주만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진행된 거의 모든 문화재 발굴 및 보수 현장에는 그의 땀과 피가 스며 있다. 그야말로 현대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였다.
흔히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사람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및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삼불 김원룡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원룡은 고고학도가 아니라 미술사학도에 가깝다. 더욱이 무령왕릉을 단 하룻밤에 도굴하듯이 발굴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문화재 바닥에서 ‘고고학을 꽃피운 인물’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김정기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고 손보기 연세대 교수다.
무엇보다 김정기는 한국 고고학 현장에 실측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금이야 발굴 현장이라면 실측이 기본이다. 그러나 김정기가 고고학 발굴 현장에 삽자루를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실측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누구도 실측 방법을 몰랐다.
김정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시즈오카 현의 가케가와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1950년 마산 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김창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공학부 건축학과에서 공부했다. 이후엔 도쿄 대학 공학부 건축사연구실 조교로 일하면서, 한국의 황룡사 터에 필적할 정도로 저명한 고대 일본의 절터 시텐노지(四天王寺) 터 발굴 현장에 종사했다.
“이 사람이 내가 늘 말하는 김정기 박사다”
1959년 김정기는 국립박물관 보급과 학예연구관으로 채용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문화재 반환 분야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오가던 황수영 동국대 총장의 눈에 띈 것이 귀국의 계기였다. 그러다가 1969년에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문화공보부 외국(外局)인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연구실(지금의 문화재청 국민문화재연구소)이라는 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을 창설하면서 김정기를 초대 실장으로 위촉한 것이다.
ⓒ연합뉴스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조사단. 가운데 흰 모자를 쓴 사람이 조사단장 김정기 박사다. |
김정기의 전성기는 박정희로부터 비롯되었다. 박정희가 1971년에 수립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경주 지역 문화재 조사 정비’였고, 이 과업의 시행 주체가 바로 문화재연구실이었다. 당시 문화재연구실은 어느 정부부처보다 각광받는 기관이었다. 박정희가 김정기를 따로 만나기도 했다.
1975년 7월2일, 국립경주박물관 신관(지금의 인왕동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경주 박물관을 신축하는 계획이 확정된 것은 ‘경주개발계획 입안(1971)’ 이전인 1968년이다. 월성 남쪽 부지(1만9826평)에 본관(1815평)과 별관(500평), 성덕대왕신종을 보관하기 위한 종각 등이 들어섰다. 개관식에는 박정희와 딸 박근혜가 참석했다. 홀로 개관식 테이프를 잘랐다. 이런 행사를 마치면, 대통령이 관계자들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는데 박정희가 특별히 부른 사람이 바로 김정기였다.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아 글쎄, 이 양반(박정희)이 김정기 박사를 부르더니 그 자리서 김 박사한테 금일봉을 주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야? 경주박물관 개관식 아냐? 한데도 박물관 사람들한테는 아무것도 안 주고 박물관과 관계없는 김 박사한테 금일봉을 주는데 참 기분이 그렇더라”고 회고했다. 정양모 관장은 그때 김정기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과 애정을 체감했다고 한다.
그날 박정희는 박근혜와 함께 신관 개관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당시 경주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에 이어 한반도 최대 고분이라는 대릉원의 황남대총(황남대총은 당시 98호분으로 불렸다)이 발굴되고 있었다. 천마총에서 화려한 금관과 천마도까지 발견했으니, 황남대총에 대한 기대도 컸다. 당시 경주개발계획에서 문화재 분야 업무를 총괄한 기관은 경주개발사적관리사무소(문화재관리국 산하)였다. 그 초대 소장이자 정통 문화 관료인 고 정재훈씨는 이후 문화재관리국장을 맡게 되는데, 생전에 그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대통령이 영애(박근혜)와 함께 98호 발굴 현장에 오셔서 둘러본 일이 있었어요. 당시 발굴단장은 김정기 박사였는데, 대통령께서 영애를 보고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늘 말하는 김정기 박사가 이 사람이다.’”
이 증언을 보면,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가족들과 경주 발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정기의 이름을 자주 언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정희가 이렇게 아낀 김정기가 타계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빈소로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는 김정기의 업적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덤 파는 게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2) | 2018.04.14 |
---|---|
“금관 빨리 파라, 각하께 갖고 가게” (0) | 2018.04.14 |
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0) | 2018.04.14 |
박정희의 황당 지시 “왕성 터에 호텔 지으라” (0) | 2018.04.14 |
어이쿠! 이거 다시 덮어야겠다 (0) | 2018.04.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