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문화계를 술렁이게 한 일 하나를 만든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차관급에서 1급으로 하향하고 국립박물관은 일체 문화재청에 흡수 통합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작은집에 먹히게 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국립박물관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 당시 문화부 전체 예산이 얼마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1조 단위를 돌파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문화부가 거느린 산하 기관에 국립박물관이 있었다. 예산 규모 역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1천억원인가 1천500억원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예산으로만 보면 박물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형편없었다. 문화부 산하 기관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그럼에도 왜 문화부에서는 내일이면 장관에서 물러나는 김종민 주재로 대책회의를 주재하는 등의 부산을 떨어야 했던가?
그것은 박물관 쪽수 때문이었다. 당시 박물관 정원은 550명에 달했다. 예산은 천억원이라는 코딱지에 불과했지만 쪽수로만 보면 거의 3분의 1정도가 되지 않았나 싶다.
당시 문화재청 정원이 800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이 800명에 550명이 합쳐지면 쪽수로만 보면 작은집인 문화재청은 큰집인 문화부에 맞먹는 규모에 도달하고 있었다.
문화부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문화부가 바라보는 문화재청은 늘 육두품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 문화재청은 교육부 외국으로 출발했다. 다시 말해 문화재관리국이 교육부 외국으로 떨어져나간 것이 시초다. 그랬던 문화재관리국이 훗날 문화공보부인가 하는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 정부부처 외국으로 넘어오고 어느새 1급 청을 거쳐 마침내 차관급 청이 되더니 이번에는 박물관까지 데려간다니? 무엇보다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문화부야 그렇고, 박물관 내부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박물관은 문화부 2차 대국민 서비스 기관이라 실상 정책을 집행하는 기능이 없다. 정책을 세운다 한들 그것은 철저히 박물관 내부용이었고 그것이 세운 어떤 정책을 국가와 국민에 대해 강제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박물관 직원들 사이에는 문화재청에 대해 고질과도 같은 우월 의식이 있었다. 바로 학예직 ‘품질’ 문제였는데, 학예직에 관한 한 늘 문화재청에 대한 뿌리 깊은 우월감이 잔존한 상태였다.
이에다가 박물관은 직급이 어찌된 셈인지 문화재청보다는 항상 한 발짝 앞서나간 상태였다. 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이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률 근거는 정부조직법이 아니다. 대통령령에 기반해서 통상 그리 대접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찌됐건 박물관은 늘 한 발짝 앞서 직급을 높여갔다. 이랬던 박물관이 느닷없이 문화재청에 먹힌다고 생각했으니 그들로서도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거의 모든 문화부 관료, 거의 모든 국립박물관 학예직이 통폐합에 반발하는 가운데 뜻밖에도 당시 아마 학예실장(아니면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있던 이영훈은 찬성 혹은 그에 가까운 의견을 낸다.
아마 장관 주재 어느 회의 석상에서도 이런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완전히 찍힌 일이 있다고 기억한다. 이는 문화부나 박물관이 보기에는 배신이였다. 더구나 이런 방침 발표에 정양모 이래 역대 국립박물관장들이 연대해서 반대 성명을 낸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밉게 보였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영훈은 통폐합을 찬성했거나, 그것이 아니라 해도 그런 반대 움직임에 미온적이기만 했을까? 당시에도 그렇고 이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을 때 사석에서 내가 직접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그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박물관이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문제의식이 투철한 가운데 나온 이른바 ‘소신 행보’였다. 박물관이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문화재청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다.
이를 나는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첫째, 문화부 내부에서 박물관의 위치다. 둘째, 그런 박물관 내부에서도 지방박물관, 특히 경주박물관의 어정쩡한 위치다.
내가 늘상 말하듯이 가뜩이나 다른 힘 있는 부처에 견주어 미약하기만 한 문화부이거니와, 그런 문화부 내부에서도 박물관은 존재감 제로에 가까운 2차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말로만 문화 시대를 떠들지만 쪽수만 많았지, 예산 지원은 쥐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영훈은 이에 분개했다.
하지만 박물관이 문화재청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일변한다. 문화재청 성격상, 그 체제에서의 박물관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판단했다고 나는 이해했다.
함에도 당장의 자존심 문제 때문에 그런 박물관 사람들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덧붙이자면 나도 그의 생각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박물관은 언젠가는 문화재청과 통폐합해야 한다.
나아가 이영훈은 지방박물관 처지에 분개했다. 산하 10여개 지방국립박물관 중에서도 경주박물관장이었던 그는 경주박물관 처지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경주박물관이 어떤 곳인가? 한국 문화재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 아닌가? 이런 경주박물관이 관장 직급만 2급 상당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내실을 따져보면 형편없었다.
이 문제를 제기할 당시 아마 경주박물관이 학예직 정원 6명 안팎이었을 것이며, 더구나 사업 예산은 10억원에도 훨씬 못미치던 시절이었다. 이 규모로는 큰 전시회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서울의 중앙박물관은 특별전시를 주로 취급하는 전시과만 해도 한 번 전시에 10억원을 쏟아붇고 있었다. 그러니 이영훈으로서는 분통이 더욱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사석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경주박물관을 독립시켜 달라. 그게 아니라면 문화재청으로 보내달라.” 사석이라 했지만, 이런 의사를 공공연히 표시하고 다녔다.
진정성이 얼마나 담겼는지 모르지만, 그와 아주 가까운 정권 핵심 인사가 있었는데 그를 향해 반농담 반진담으로 이렇게 말한 일도 있다고 기억한다.
그러면서 당시 경주박물관 처지를 다른 유사 기관과 비교한 일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 무렵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브랜치 중 하나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학예직 10명인가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당시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박물관(나중에 해양문화재연구소로 개칭)이 4급 과장급 과가 3개인가 있었다. 같은 문화재청 산하 고궁박물관도 비슷한 규모였고, 신생으로 등장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이 정도 규모였다.
이영훈은 특히나 이들 신생 기관, 혹은 유사기관 예산이 보통 100억원을 상회하는 반면, 경주박물관 예산은 형편없는 사정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이영훈은 이런 사람이다. 내가 보는 그는 소위 보스형 학예직의 마지막 세대다.
그는 때론 엄청난 견제를 받으면서도 보스형 선배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박물관에서 승승 장구했다. 그런 까닭에 그를 따르는 후배는 엄청 많다. 단순히 술로 자기를 따르는 후배들을 만드는 유형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위에서 보기에는 때에 따라서는 부담감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다. 다만 하나 다행인 점은 박물관은 정치 바람에서 상대적으로 안전지대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인물이다.
박물관 처지에 대한 처절한 자기 인식, 혹은 그 안에서 지방박물관의 처절한 자기 인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위 그를 논할 때 흔히 하는 말인 뚝심 때문이었을까는 모르겠지만, 보란듯이 경주에서 그는 누구도 꿈꾸지 못한 쿠데타를 일으킨다.
수장고를 풀어해친 것이다. (2016.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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