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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니코스 카잔찬키스 무덤을 배회하는 한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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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oo.gl/maps/b1VkHmYP4odN7fFY9

35°19'57.6"N 25°07'50.9"E

www.google.com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비문에는 이렇게 썼다.





이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나는 바라는 게 암것도 없다. 내가 두려운 건 암것도 없다. 난 자유다.


저 자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독신이라는 뜻도 있다지만

이곳에 잠든 그리스 문호, 국내선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로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 그를 소화한 독자가 그 명성만큼이나 두터운가가 궁금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Nikos Kazantzakis(1883년 2월 18일~1957년 10월 26일)


마누래 무덤



그는 자유인을 선언했지만 독신은 아니었고 한 번도 부족해 두 번 결혼했으니

크레타 주도 이라클리오Ηράκλειο, Heraklion or Herakleion 사방을 조망하는 곳에 자리잡은 그의 무덤 곁에는 그의 마누라도 함께 묻혔다.

이 무덤은 놀랍게도 이라클리오 옛 베네치안 성벽 Venetian city walls 중에서도 우리네 성곽 치에 해당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앞쪽이 마누래 저 뒤쪽 복판이 카잔찬키스



이곳을 마르티넨고 바스티온 Martinengo Bastion이라 하는데 이곳이 이라클리오에서는 조망성이 가장 좋은 지점 중 하나다.

왜 이곳일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헤라클리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소련,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그는 평생 동안 특히 교회와 우파들한테 적지 않은 비난에 시달리어니와, 문학작품을 비롯한 여러 경로로 쏟아낸 메시지 때문이었다.


두 문호의 만남



카잔차키스는 백혈병 투병 끝에 1957년 사망한다.

1955년 그리스 정교회 Greek Orthodox Church가 그를 파문했으니 묘지에 묻힐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독방을 차지했으니 어랏? 당하고 보니 좋네?

니코스 카잔차키스 시신이 고향의 성벽 위에 안치된 비롯이다.




우리 같음 문화재 훼손 행위지만 그리스 위상 크레타 위상을 저 정도로 높여줬다면 아예 이라클리오 하늘에다 그의 시신을 매달아야지 않겠는가?

방형 바스티온은 그 연륜이 묻어나거니와 보존 상태도 아주 좋다.

그 위 평탄대지 주변을 따라 덤불 식물이 자라고 야자수 나무도 몇 그루 있다.




그 잔디 공원 중앙 일정 구간을 돌로 깔고 돌덩이 몇 개로 무덤을 표식했으니

전통적인 대리석 장식 대신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신나서



저 나무 쉬 썩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그야 지들이 알아서들 처치할 문제겠고

그 표지석에 저 문구를 박아놨다.

카잔찬키스는 여러번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엔 실패했다.

그 점에서 그는 한국 현대작가 한강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현장에선 나도 모르게 한강을 떠올렸으니 앞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으로 그런 사람이 부쩍 많아지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저 조르바 말이다. 아주 오래전에 의무감으로 펼치긴 한 듯한데 전연 기억에 없다.

그땐 의무감이었으나 이젠 미안함으로 읽어봐야겠다.

조르바, 처음 얘기 들었을 때는 쭈쭈바 상품명인 줄 알았다.

사흘간 크레타 서쪽 하니아Chania 일대 유람을 끝내고선 차를 몰아 150키로를 달려 해지기 전 닿는다 했지만

그 유해를 밟을 때 이미 해는 에게해 서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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