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광개토왕 비문에다가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대 고구려 정벌 군사 정벌 청원서 등등을 버무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이 문제가 두 왕조 사이에서는 심각했음을 본다.
그 등장 시점을 보면 두 왕조는 거의 동시기라,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이요, 백제가 그보다 19년이 늦은 기원전 18년이며
더구나 그 뿌리가 실상은 부여로 같다.
세대로 보면 백제가 한 세대가 딱 뒤지는데, 그건 주몽과 온조 관계 때문에 그렇다.
주몽은 온조의 양아버지였찌만, 대권을 그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고,
뒤늦에 부여에서 친아들 유리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세자로 책봉하고는 대권을 물려준다.
난 주몽이 일부러 유리를 불러들였다고 본다.
솔까 친아들인지 아닌지 어찌 안단 말인가?
두 왕조는 태생 자체가 결국은 쌈박질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무엇보다 누가 부여 적통인가를 두고선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불사한다.
개국 직후 두 왕조는 이런 일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데다, 왕조 초기라 서로 먹고 살기 바빠서였는데,
두 왕조가 살아남아 서서히 성정하고 국경을 맞닿게 되자 상황이 돌변했다.
그것이 낙랑 약화와 아무리 봐도 맞물리는 듯한데, 이 낙랑은 여러 논란이 있으므로,
아무튼 우리 생각보다 더 왕조간 접촉과에 그에 따른 분쟁 발생은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근초고 근구수왕 시절에 두 왕조는 명운을 건 한판 대결을 펼치는데 이에서 실은 고구려가 참패했다.
그 왕 고국원왕까지 흐르는 화살을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훅 갔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왕조는 아무리 봐도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게 되는데,
수면 아래 잠복하던 정통성 논쟁이 불거지게 된다고 봐야 한다.
이 정통성 논쟁에서 고구려는 일단 앞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주몽 역시 도망자 신분이었으나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세가 마침내 종주국 부여까지 수중에 넣으면서 부여를 독점할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또한 부여 떨거지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백제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떨어진 더 떨거지였다.
처첩대전이라 하지만 실상 가장 무서운 것은 처와 첩들간 전쟁이 아니라 첩들끼리 전쟁이다.
이 전쟁은 부처님도 고개를 돌리고 마는데 실제 그런 이전투구 양상으로 전개되어
고구려는 훗날 광개토 시절에 조금 복수를 하고, 그 다음 장수왕 시대에는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까지 참수하면서 확실한 우위를 점거하게 되지만 이 역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무령왕에 의한 갱위강국更爲强國은 실상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실제 이 무렵을 고비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취해 성왕시대 중말기까지는 한껏 기세를 드높이게 된다.
저 정통성 확보 문제를 단순히 계승의식 뭐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는데, 천만에!
내 보기엔 왕조의 명운을 건 일대 정통성 논쟁이었다.
이 일대 분란 일전 불사라는 키워드를 갖고 접근해야 내가 앞서 말한 광개토왕비 문제,
곧 그것은 백제에 대한 야유 경멸이 아니라
실상은 백제에 대한 한없는 고구려의 공포가 도사린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읽어얄 것은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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