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생산은 400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제국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유리 제작을 예술 형식으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 공화국(기원전509-27) 시대에는 용융 유리 molten glass에 단단한 코어 solid core를 덮어 단순한 용기를 만들었다.
유리 막대 canes of glass를 사용하여 색상의 모자이크를 만들 수 있었지만 과정은 느리고 집중적이었으며 최종 결과는 두껍고 무거웠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중반, 로마가 지중해의 지배적인 정치, 군사, 경제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을 때
시리아 장인들이 개척한 유리 대롱 불기glass-blowing라는 새로운 기술이 도착했다.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유리 산업에 혁명을 일으켜 로마인들이 훨씬 더 빠르게, 훨씬 적은 비용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했다.
다공성이 없고 Non-porous 냄새가 없으며 odourless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유리는 도자기를 빠르게 제치고 음용 그릇에 가장 인기 있는 재료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 14년) 통치 기간에 이르러 일부 점토 컵 생산이 완전히 중단기도 했으니 유리산업이 초래한 현상이다.
대규모 유리 생산 센터는 화씨 1,000도 이상의 온도에 도달해야 하는 가마에 필요한 원료,
곧 주로 모래, 소금 및 목재 공급원 근처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었다.
'슬래그slag'로 알려진 모양이 없는 유리 덩어리는 지역 장인들이 2차 작업장에서 재용융하기 위해
제국 주변에서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도시로 거래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유리를 자주 재활용했다.
로마의 유리 제조는 트라야누스Trajan(서기 98-117) 통치하에 제국이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하면서 서기 2세기에 절정에 달한다.
수세기에 걸쳐 그것을 제조하는 데 사용된 기술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스타일은 더 지역화했다.
서기 330년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동행한 유리공들에게 세금 면제를 해주었고,
이로써 마침내 이탈리아 유리 생산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런던 크리스티 골동품 전문가인 클라우디오 코르시Claudio Corsi는 '로마인들은 정교하게 물 흐르는 듯한 식기부터 눈에 띄는 가느다란 플라스크에 이르기까지 많은 참신한 유리 디자인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가장 정교한 예들 중 일부는 와인 통, 과일, 헬멧, 생선처럼 생겼다.
금속 산화물을 추가하여 정교한 색 구성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철은 유리를 초록색으로 바꾸고 망간은 보라색으로 만든다.
다른 일반적인 색상으로는 파란색, 갈색 및 노란색이 있다.
줄무늬와 나선형은 용융 유리를 통해 추적하거나 유리실 형태로 추가할 수 있다.
더 두꺼운 스트립은 또한 패턴화한 핸들을 만들기 위해 용기 외부에다가 부착하기도 했다.
어떤 예들은 선반으로 표면을 자른 디자인도 있었다.
다른 예들은 유리 층 사이에 금박을 끼우기도 했다.
그러나 서기 1세기까지 가장 귀중한 로마 유리는 무색이었다.
이것은 그 생성이 어떤 색조도 중화시키기 위해 복잡한 화학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大 플리니우스 Pliny the Elder는 또한 그것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물질 중 하나이자 네로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물질인 암석 결정과 닮았다고 언급했다.
로마 유리 생산의 정점은 서기 4세기에 '케이지 컵cage cup'이 발명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컵은 외부에 별도의 '부유' 천공 패널 ‘floating’ perforated panel 이 있는 내부 유리 용기다.
케이지 컵 제작은 너무 복잡해서 학자들은 여전히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오늘날 약 50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은 조각 상태다.
가장 유명한 예는 영국박물관에 있는 리쿠르구스 컵 Lycurgus Cup이다.
그것은 또 다른 로마 발명품인 이색성 유리 dichroic glass로 만들어졌는데,
이 유리에는 금과 은의 작은 입자가 들어 있어 빛에 고정되면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한다.
사진은 로마시대 파란색과 불투명한 흰색 대리석 유리 운겐타리움unguentarium (서기 1세기)이다.
가는 긴 목에다 쪼그려 앉은 듯한 몸체, 가장자리와 안쪽으로 접힌 주둥이를 갖췄으며, 불투명한 흰색 흔적으로 전체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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