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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 난 콩보다 흔적이 없는 서울 고려 흔적, 종로 신영동 유적의 혁명성

by taeshik.kim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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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네들 특유하는 자신감이 있다. 유물 유적이 팩트를 말해준다는 믿음 말이다. 과연 그런가? 실상을 따지자면 고고학이 증언하는 역사는 편린에 지나지 아니하며, 또 자주 망각을 유도한다. 

내가 항용 드는 보기로 신라에 의한 서울 지배, 그리고 고려왕조에 의한 서울 경영 두 가지가 있다.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매양 하는 말이지만, 신라가 지금의 서울을 포함하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시점은 553년 진흥왕 시대다. 이후 신라는 후삼국 혼란기까지 대략 350년간 단 한 번도 이 지역 지배권을 잃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증언하는 고고학적(이 경우 고고학이라 불러야는지조차 의심스럽기는 하다만) 흔적은 오직 북한산 비봉 순수비 꼴랑 하나만 있을 뿐이다. 
 

혜음원지를 닮은 것만은 분명하다. 대전 상대동과는 또 다른 듯하다. 왕궁 부속 건물이 되지 말란 법 있는가?

 
근자 간헐로 신라 혹은 통일신라 흔적이 서울에서 발견되기는 한다만, 그것로 이 일대를 신라가 확실히 지배했다는 증거는 오직 저 비봉 순수비 하나만 있을 뿐이다. 

고려가 멸망한 시점은 1392년, 지금으로부터 불과 700년 전이다.

그 고려 왕조가 존속한 거의 500년 내내 고려는 수도-부수도 시스템을 운영했으니, 개경이 메인 캐피털이었고, 평양과 서울, 그리고 경주가 부수도였으니, 이를 개경을 중심으로 상대적 방위명을 부여해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서울을 남경南京이라 하며, 경주를 동경東京이라 했다. 

서울만 국한하면, 그에 남은 고려시대 흔적은 북한산 기슭 승가사던가? 그쪽에 남은 불상 1점인가와 더불어 그 터 두어 군데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건물군 위상이 녹록치 않음을 증언하지 않는가?

 
고고학 성과로만 보면 한강 유역 서울이 신라 지배에 몇 백년을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내내 고려 영역이었다는 흔적은 아주 없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흔적이란 이렇게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는 고고학에 대한 믿음을 근간에서 흔든다. 간단히 말해 고고학 증거로 보면 서울은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지배하에 놓인 적도 없다는 처참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종로구 신영동 248-32번지 일대에서 고려시대 대형 건물지가 출현한 일을 허심하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예서 대형 건물지란 두 가지 맥락이 있으니, 첫째 특정한 건물터 하나가 크거나, 둘째 개별 건물터는 크지 않다 해도 그런 뭉치가 그룹을 이룬 터가 대형인 경우가 있으니 이 경우는 현재까지는 후자로 보아야 할 성 싶다. 

그 어떤 경우건, 또 믿거나 말거나 이 건물터 출현은 고려가 실효적으로 서울을 경영했음을 보여주는 현재까지 거의 유일한 고고학적 증거다!!! 안 믿기는가? 

남경이 존치한 종로 일대에서 고려시대 흔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어디에선가 고려시대로 편년하는 가마터가 희미하게 확인된 적이 있고, 그 시대 건물터라 할 만한 쥐꼬리 만한 흔적이 더러 감지되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다 쪼가리 쪼막디뿐이었으며 이번과 같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믿거나 말거나 단군조선 이래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사도에 따라 약간 단을 두고 대지를 조성하고는 그 위에다가 상자형 규격화 건물을 올렸다.

 
이제 문제는 이 건물터, 혹은 건물군群이 도대체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가다. 이는 여전히 발굴이 진행 중이고, 또 조사 면적이 공사를 진행하기로 한 일부 면적에 국한한 까닭에 종잡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이 경우 사람들, 더 정확히는 고려시대를 공부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역사 덕후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는 혹 이 자리가 미궁에 빠진 고려시대 남경 왕궁인가 아닌가 한다. 그에 대해서는 그 어떤 단안을 내리기가 현재로서는 힘들다. 

나? 왕궁일 가능성을 내치지 않는다. 왜? 이 발굴 이전에 나는 세검정을 중심으로 하는 평창동과 구기동 일대가 그 왕궁이 있던 데가 아닐까 의심을 떨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물론 안다. 기존 그 남경 왕궁 자리는 경복궁 뒤편 지금의 청와대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군림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 알고 있음에도, 내가 왜 다른 곳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는가? 무엇보다 청와대 일대라 하지만, 내가 찾아본 그 어떤 그에 관련한 증언들에서도 진짜로 청와대 일대가 왕궁이 있던 자리라는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자 같은데?

 
 
그 자리를 찾고자 수시로 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기록을 뒤졌다. 

그러고 다른 무엇보다 진흥왕 순수비 자리인 비봉을 자주 올랐거니와, 그에서 조망하는 주변 일대 풍광을 볼 때, 그리고 고려시대 왕들이 걸핏하면 남경으로 행차하면서 보인 행태들을 볼 적에 구기동 혹은 평창동 일대가 남경 왕궁이 있던 곳이 아닐까 강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 이번에 등장한 고려시대 건물터를 보면, 또 그 양상이나, 출토 유물을 볼 적에, 내 어떤 지인이 피력한 대로 파주 혜음원 같은 원院, 곧 역참이면서 그 주변 어딘가에는 절까지 갖춘 다용도 종합 위락시설로 볼 가능성이 더 큰 듯하거니와, 실제 경복궁이 정궁으로 기능하던 조선시대 세검정은 손님을 전별하는 위락시설이기도 했거니와, 역원 같은 시설일 수 있다. 

 

굽은 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진
전형하는 고려시대 기와
장단지? 철저히 실생활 기반이다.

 
발굴 유물을 보면 불교 색채가 거의 없어 이런 대형 건물이라면 대뜸 떠올리는 불교 사찰은 아닌 듯하며, 이른바 실생활 용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역원일 가능성이 좀 크다고 하겠지만,(실제 혜음원지를 오랜동안 판 서영일 형은 그 발굴양상을 보고는 대뜸 혜원원을 떠올렸지만) 나는 왕궁일 가능성도 내치지 못한다고 본다. 

혹 아는가? 이번에 판 데가 미궁에 빠진 고려 남경 그 왕궁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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