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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예산 가야사지서 고려 왕실 관련 흔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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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전경. 중심부로 뚜렷한 줄고래가 확인된다. 아래쪽으로 남연군묘 일부가 보인다. 발굴조사지역은 묘 중심으로 서쪽이다. 

 

충남 예산군이 연차 발굴조사 중인 가야사지 올해 제6차 발굴성과가 최근 공개되었으니, 이 소식은 우리 공장에서는 언급하지 아니해서 예산군 쪽으로 알아보니, 지역 주재 기자들한테만 배포했단다. 아마 중요성이 덜하다 해서 건너뛴 것으로 보이며, 다른 언론도 보니 두어 곳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치는 정도다. 

 

이에 이번 발굴성과가 어떠한지를 관련 자료를 예산군에서 넘겨받아 소개하니, 참고들 바란다. 조사는 예산군 의뢰로 동방문화재연구원에서 했다. 뒤에서 보겠지만, 흥선대원군 이하응 아버지 남연군 묘가 이 절을 파괴하고 들어섰거니와, 이번 발굴에서는 본래 절터와 남연군 묘역이 어디에서 만나고 겹치는 지를 보여주는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유념할 만하다.

 

남연균묘와 가야사 발굴지역. 아래 사진 붉은 네모로 표시한 데가 사찰 중심구역으로 추정한다. 보다시피 묫자리가 중심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 묘를 기준으로 저짝 발굴지역이 서쪽이다. 

 

남연군묘 중심 구역이 탑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하는 모양인데, 글타고 오페르트조차 파다가 관둔 남연군 묘를 파제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환장할 일 아니겠는가? 

 

기억할 점은 가야사지가 분포하는 범위와 양상을 파악을 위해 2012년 이래 2016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총 5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있었고, 올해 6차 조사는 사찰 중심 구역으로 추정하는 남연군묘 기준으로 서쪽 지역으로 지번으로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 산5-29번지 일대 2,300㎡라 한다.  

 

아래는 예산군이 배포한 관련 보도자료 전문이다. 

 

 

1~6차 발굴조사 지역

 

그간 발굴조사. 기관이 다르다. 이건 문제다. 

 

예산군,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150호 '가야사지' 제6차 발굴조사
- 고려시대 왕실 관련 유적 확인 -

 예산군은 충청남도 지원으로 추진한 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150호 예산 가야사지 발굴조사 성과를 3일 공개했다.

 

6차 발굴조사 유구 배치 양상
6차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고려시대 및 그 이전 유구 배치 양상
6차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조선시대 이래 건물 배치 양상



이번 가야사지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전기∼조선시대 중기에 건립된 건물지, 담장지, 축대 등이 여러 차례 겹쳐 있는 상태이며, 사역寺域이 남연군묘 동쪽 끝부분까지 확인된다.

특히 이번에 발굴 조사된 유적 중 고려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립식 기단基壇 건물지 2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동쪽구역 고려시대 건물지 및 답도

 

용두
명문기와 
암수막새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한 조립식 기단 건물지는 충남지역에서는 처음 조사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9세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는 것이 군의 설명이다.

유물로는 고려시대 ‘가량갑사加良岬寺’명 암키와, 조선시대 광해군 3년(1611)에 제작된 ‘만력삼십구년신해○○○(萬曆三十九年辛亥○○○)’명 암막새 기와와 곱새기와, 마루 암막새, 연화문·일휘문 수막새, 당초문·일휘문 암막새 등이 출토됐다.

아울러 지난 2018년도 조사에서는 용머리, 치문鴟吻 등 지붕에 장식했던 중요 유물이 수습됐는데 이들 장식기와는 고려 왕궁이 있었던 만월대, 파주 혜음원지 등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이러한 점으로 고려시대 건물지는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건물터(절터)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 남쪽축대 전경(남에서)
고려시대 남쪽축대 세부1(남에서)
고려시대 남쪽축대 세부2(남서에서)


또한 2018년 6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의 추가조사를 진행한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원장 이호형)은 기록에서 보이는 금탑이 있었던 자리에 남연군묘를 이장했는지 여부는 향후 봉분주변까지 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했다.

 

황선봉 군수는 “남연군묘와 가야사지 유적과의 연관성이 확인된 만큼 예산 가야사지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하겠다”며 “향후 역사유적 공원으로 조성해 지역주민들과 가야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역사문화를 알 수 있도록 조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고려시대 북쪽축대 전경(북에서)
고려시대 북쪽축대 세부1(북에서)
고려시대 북쪽축대 세부2(북서에서)

 

이번 조사 약보고서에서 조사단은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이번 조사지역에는 현재까지 평면 노출한 각 시대의 문화층 및 탐색 피트를 통해 파악한 결과, 크게 고려이전․고려시대․조선시대 문화층이 있으며, 고려시대 문화층 2~3개 문화층으로 세분되고, 조선시대 문화층도 2개 문화층으로 세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각 문화층은 수직적인 중첩 정도가 매우 심하여 현재 노출한 문화층의 아래에 있는 유구의 양상은 존재만 추정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 또는 추정할 수 있는 유구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이전 문화층에는 추정 축대와 건물지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4동, 대지조성 축대 2기, 담장지 2기, 답도 1기 등이 확인 또는 추정된다. 조선시대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2동, 축대 2기, 추정 계단 1기, 담장열 3기, 미상석렬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조선시대 방구들과 굴뚝 세부

 

가야사에 대한 주요한 증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高麗史節要』 明宗 7(1177년) 2月 10日
“庚辰 伊等復叛, 寇伽耶寺.”
→ 경진년 망이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가야사를 침탈하였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卷第十九, 「忠淸道」, <德山縣> - 1530년
佛宇】 伽倻寺 在伽倻山”
→ 【불우】 가야사 가야산에 있다.

 

○ 『輿地圖書』,「忠淸道」, <德山>, 寺刹 - 1757년 ~ 1765년
“伽倻寺 在縣西十里伽倻山下”
→ 가야사 현 서쪽 십리의 가야산 아래에 있다.


○ 『燃藜室記述』 別集 第16券, 「地理典故」, <山川>
“海美伽倻山. 與象王山相連. 東有伽倻寺洞壑. 卽上古象王宮闕基址.”
→ 해미의 가야산: 상왕산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가 있는 동굴과 계곡은 곧 옛날 상왕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 『續陰晴史』 券7, 高宗30年癸巳正月~十二月癸巳五月
“…自此抵倻洞, 山路崎嶇, 處處泉聲耳, 至南延君墓所, 卽伽倻寺建塔之墟也, 山勢雄壯, 四面拱護,
遠眺明淨,…”
→ 가야동에 이르니, 산길이 험하고, 곳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남쪽으로 이어진 임금(남연군)의 묘소에 이르니, 이곳이 곧 가야사의 탑이 건축되었던 터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면이 껴안듯 보호하며, 멀리 바라보니 밝고 깨끗하다.

 

조선시대 구들

 

○ 『梅泉野錄』券7, 上(甲午以前), 黃玹40)
“南延君球有四子 興宣其季子, 初南延卒 興宣年方十八. 隨地師 至德山大德寺 師指一古塔曰 彼吉壤 貴不可言. 興宣卽返 盡賣其産地得錢二萬兩, 携其半 賂寺住持僧 使火之 於是寺盡樊. 興宣奉喪至 掃灰而停焉夜半. 諸兄皆蹶起話夢 有白衣老叟怒罵曰 我塔神 汝何奪我居 若遂葬 未虞卒四兄弟暴亡速可去 乃三人一夢. 興宣責曰 果爾則誠吉矣, 命有主焉 神何能祟 且宗室日替 我兄弟棲棲與其日曳裾壯金之門 冀添丐以苟活 毋寧一時溘然爲快乎 諸兄皆有子矣 無一塊血者我而已 然四則無畏 諸兄毋多談 詰朝打塔 則址皆石也 使斧之 斧輒自躍 遂自荷斧 向空大喝 斧不復躍 旣窆 恐後惑遷也. 鎔鐵 數萬斤錮之 重加莎土焉. 因携還京 渡水原大浦津 僧於舟中忽大呼救火 搶頭作灼爛狀須臾躍入水以死. 其與衆稱南延君墓 爲伏雉形 後十四年 今上誕焉 甲子(高宗元年)後 以國力創一寺於大德之陰 名報德 而土木金碧 極其壯麗 賜與土田貨寶甚厚. 丙寅(高宗三年)冬 洋寇自江華遁我民之染邪者 導之至德山 欲發墓 而錮不可開 但火其塋而走 大院君嘗語李建昌 以葬時事曰 塔旣折 中有二白磁團茶二缾舍利珠三枚 珠如小頭 甚明瑩 沈水以呑之 靑氣貫水 如縷煙云.”

 

조선시대 중앙구역 건물터


→ 남연군南延君球(흥선군의 아버지, 諡는 忠正)의 아들 4명 중 興宣君은 그 끝이었다. 남연군이 작고할 때 흥선군의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地師를 따라 德山의 大德寺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古塔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吉地라 그 귀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만냥을 마련한 후, 그 절반을 대덕사의 주지에게 주어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뫼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다.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塔神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앗아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하면 虞祭가 끝나기 전에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가거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분통을 터뜨리며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吉地입니다. 운명이란 주관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神이 어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리고 宗室이 날로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壯金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히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도 튀기만하여, 그는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하여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자 다시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여 하관을 한 후 혹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수만 근의 철을 녹여 지어 붓고 그 위에 莎土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님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大浦津을 건널 무럽,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南廷君의 묘가 伏稚形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이 탄생하였다. 

 

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야사는 덕산현 치소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가야산 아래에 있고, 궁궐이라 칭할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다. 현재 남연군묘가 자리한 곳은 가야사의 탑이 있던 곳이다. 다만 매천야록에 의하면 남연군묘가 조성되던 19세기에는 가야사가 아닌 대덕사가 등장하는데, 절의 명칭만 변경된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절이 사라지고 다른 절이 조성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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