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조선 후기 양반이 되는 방법으로
족보를 산다던가,
공명첩으로 벼슬을 산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양반이 된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적이다.
족보도 공명첩도 모두 호적을 잘 꾸며 놓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호적이 왜 중요한가.
바로 양반이냐 평민-노비냐를 구분하는 데 있어 첫 번째 지표,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에 들어간 정보 중 가장 중요하다 할 군역의 직역에서
양반 직역을 호적에 표시해 놓는 것이 양반이 되는 첫발이기 때문이다.
이 호적에 양반직역을 적기 위해선
앞서 말한 대로 친가 3대조, 외조부, 처가 3대조, 외조부의 이름과 직역이 필요하고
이 조상의 이름과 그들의 양반직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짜 족보도 필요한 것이다.
가짜 족보를 하나 사서 구했다고 치자.
그걸 마을 들고다니면서 자랑했겠는가?
이 가짜족보는 호적을 고쳐 놓기 위한 주변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명첩이라는 것도 그렇다.
이 역시 족보의 직역에 단순한 유학 대신
좀 더 폼나는 벼슬 이름을 적어 놓기 위해 공명첩도 사들이고,
아예 3대조를 공명첩으로 추증도 하는 것이지
그냥 공명첩 덜렁 사서는 그걸 액자에 걸어 놓겠는가 이마에 붙이고 다니겠는가.
결국 조선시대 신분제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족보도 공명첩도 아니고, 호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호적의 직역을 양반직역으로 고쳐 놓기 위해 조선 사람들은 그 난리를 친 것이고,
그 양반직역으로 고쳐놓기 위해서는 결국 글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거기서 못 배운 한이 나온 것이다.
조선사람들에게 있어 "못배운 한"이 무슨 학문적 동기에서 나온 게 아니다.
배워야 신분이 바뀔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
흔히 조선시대 양반 신분에서 "글을 한 줄 아는 것"을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데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호적에 한량으로 적힌 이가
자신은 글을 하는데 왜 유학이 아니냐며 항의하는 장면도 본다.
"글을 할 줄 아는 것"이 의외로 양반신분을 인정받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참.
조선후기에 제대로 된 양반은 글을 하건 못하건 군역에서 빠지는 것이 당연시 되면서
전통의 양반 신분인데도 아예 글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이들이 뭐가 되느냐.
무과에 응시해서 무인의 길을 걷는다.
이순신이 괜히 주변 무인들을 비하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무인 중에는 글 못하는 이들 꽤 있었을 것이다.
양반이라고 다 글 잘하는 게 아니다.
전통의 명가 후손이라고 글 잘하는것도 아니다.
감춰서 그렇지 그 중에 바보 없었을 것이며
놀고 먹는 놈 없었겠는가.
유럽 귀족들도 까막눈 많았다.
*** [편집자주] ***
호적은 공증을 받는 일이라 이 공증 주체가 관이라는 점이 중대하다.
이 공증을 위한 필수조건이 족보였다.
위선은 족보를 바꾸어야 했다.
그 점에서 족보랑 호적은 바로 私가 公으로 치환하는 연결고리였다.
왜 서자들이 위선 집안에서 족보를 바꾸고자 부림쳤는가?
그 성공으로 그들의 한은 풀리는 게 아니었다.
족보를 바꾼 다음 곧바로 저들은 관가를 쳐들어갔다.
가장 빠른 신분세탁은 관리가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대과 소과는 엄두에도 두지 못했다.
이들에게 무과는 어둠의 빛이었다.
애초엔 경시된 무과가 훗날 경쟁율 폭발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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