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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간도 이주민처럼 숨어 든 위만

by 초야잠필 2025.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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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러스를 양분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설정된 버퍼존buffer zone. 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도망쳐 그 무리와 함께 처음 숨어든 땅은

한나라가 지키는 요새 바깥은 공지空地였다. 

그리고 이 공지는 고조선 땅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는 고조선과 한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공지였다는 말이다. 

고조선으로서는 공지에 사는 위만을 서쪽 변경을 지키는 박사로 임명했다니

고조선이 볼 때 그 땅은 공지가 아니라 자기들 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땅은 비워둔 땅이었다. 

관념상 누구의 땅이건 간에 일단 비운다는 말이다. 

청나라 때 유조변柳條邊 바깥 땅도 관념상으로는 청나라 땅이었지만 

자기네들 땅을 비워 공지로 만든 것이다. 
 

물론 간도 전체가 무주공산은 아니었다. 저기도 엄연히 주인이 있었다. 그걸 탈취한 것이다.

 
DMZ가 오늘날 한국과 북한 사이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겠다. 

위만이 건너와 살았다는 한나라 요새 바깥의 공지는 

아마도 청나라 때 유조변 바깥에서 압록강 북쪽에 설정된 

공지와 거의 방불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공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위만이 동래東來했을 때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양국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흔히 고대국가 경계가 되는 지역에

유적이 많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이러한 것들도 모두 양국간 경계의 공지다. 

관념상으로는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어 선으로 표시되지만

실제로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지를 만들었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가 되는 평양 일대가 

굳이 그 시대에 황무지로 남게 된 것은 양국간 공지를 그곳에 설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고려 초기에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개발한다는 것은 

곧 북방국경 너머의 공지를 그보다 더 위로 올린다는 이야기와 같다. 
 

바늘 꽃을 땅 없이 대치한 중국과 인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에 설정된 공지가 

서경이 개발된 후에는 아마 더 북쪽으로 올라갔을 텐데 

그곳이 바로 강동육주 일대가 아닐까. 

이 국가간 경계가 되는, 빈 땅은 

항상 월경자의 땅이 되었으며 

순치되지 않은 종족의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론상으로는 거란과 고려가 국경을 맞대어야 하는 강동육주에

여진이 나타난 것도 같은 이유이다. 

공지는 역사상 실존한 땅으로서 

양국이 실효지배한 땅 바깥의 독특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현대국가의 눈으로 보아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며

봉금封禁 지역으로 넘어들어간 18-19세기 조선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

 
이 버퍼존 buffer zone, 완충지대 문제는 꼭 국가간 국경 문제가 아니라도 다른 부문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문화재 구역의 경우 지정 구역이 있고 그 배타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지점 사이에는 버퍼존이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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