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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로를 통한 중국 사행길을 표시하는 이 지도를 보면,
동쪽으로 이어진 중국의 경계가 압록강과 거리를 두고 남하하다가 압록강 어귀에서 만다는 것을 본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유조변柳條邊으로 봉금封禁 지역으로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경계선으로 안다.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국경은 공식적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었지만,
조선측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 저 유조변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십 킬로미터에 걸친 공지를 거쳐야 했던 것으로 안다.
조선 쪽에서는 압록강을 넘어 저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모종의 허가가 필요하며,
이는 중국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저 유조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니
곧 유조변의 동쪽이 소위 말하는 봉금지역이 되겠다.
이 공지 아닌 공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일까.
바로 전염병이 중국 대륙에서 한국으로 바로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어벽 역할을 했던 듯하다.
양국 사이에 존재한 저 공지空地가 없었다면
우리 조선 후기는 중국 쪽에서 빈발하는 전염병이 무시로 이쪽에 퍼져
정신 없었을 터인데,
다행히 저 공지 덕에 대륙에서 우리 쪽으로 전염병은 생각보다 많이 넘어오지 않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학사적 관점에서 보는 저 공지의 역할은
저 공지가 무력화했 때 어떠한 사건이 한국사에서 벌어졌는가를 보면 안다.
바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로 밀어닥친 당시,
소한테 걸리는 우역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퍼져
전국의 소가 씨가 마를 정도로 다 죽어버려
조정에서는 번식시킬 소를 구해 몽골까지 가야 할 판이었다.
한국사 최초의 콜레라 감염이 1821년, 중국 쪽에서 우리에게 넘어와 전국에 막대한 사망자를 내는데,
이 당시 콜레라가 우리쪽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혹시 저 공지가 무력화한 탓은 아닌지,
사학계에서 한 번 검토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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