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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간략히 살피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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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대홍수 참상을 증언하는 대명사와도 같은 장면. 사진 설명에 의하면 대정 14년 7월 8일 용산 한강통이라 한다.

 
홍수라는 고고학자
앞에서 1997년 이후 풍납토성 일대에서 있었던 몇 차례 발굴 사례를 보았다. 누누이 지적했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겠지만 풍납토성은 넓이가 22만 6천 평이다. 이 중에서 발굴이 이뤄진 곳은 정확한 통계가 없어 모르겠으나 전체 면적 중 10%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발굴다운 발굴은 1997년 이형구로 시작이 되는데 그 이전에는 발굴이 아예 없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1964년에 김원룡이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발굴한 적이 있으며 그에 앞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의한 발굴도 있었다.
 
사람과 홍수가 합작한 1997년 이전 이 두 발굴은 파란으로 점철된 20세기 이후 풍납토성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김원룡이 주도한 시범 발굴이 있기 바로 전 해인 1963년에 있었던 성벽에 대한 사적 지정도 20세기 풍납토성사를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다.
 

을축년대홍수는 홍보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을축년 대홍수
1925년은 간지로는 을축년(年)이었다. 이해 여름 한강하루 일대 중부 지방에는 두 차례 홍수가 있었다. 1차는 7월(368쪽) 9~12일에 있었고 2차는 물이 채 빠지기도 전인 같은 달 15~19일에 일어났다.
 
당시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해 7월 7일 필리핀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 시작 4일 만인 11일에는 서해안까지 진출했다. 내가 기상청에 출입하며 알게 된 기상 상식으로는 이렇게 되면 태풍은 대체로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 북상을 해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된 뒤 소멸해 버리곤 한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이 태풍은 서해에서 좀처럼 전진을 하지 못했다. 여름철 한반도 날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오호츠크해 고기압 세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 고기압이 열대성저기압인 태풍의 진로를 막아선 것이다.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는 부분에서는 대기가 대단히 불안정해 억수같은 비를 만들어 내곤 한다. 당시 한강 유역 중부 지방이 바로 그랬다. 마치 오호츠크해 고기압과 열대성 저기압인 태풍이 벌이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돌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가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태풍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기 전인 6일부터 꽤 많이 내렸다. 그런데다가 태풍까지 합세해 9~11일에는 폭우로 돌변했다. 비가 가장 많이 내린 10일 하루 강수량을 보면 서울 196.6m, 의정부 193.7㎜를 필두로 남한강 유역보다 북한강 유역이 더욱 심해 가평 170.0mm, 춘천 146.3mm, 홍천 144.5배 등이었다. 이른바 게릴라성 폭우였다. (370쪽)
 

대정 14년 7월 8일 을축년대홍수 당시 신구 용산 대침수 전경이라 한다.



한강 하류가 범람함은 당연했다. 더구나 일제 치하였던 당시에는 제방 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데다 한강 중 · 상류 지역 산림까지 마구 벌채하는 바람에 홍수 피해는 더욱 극심했다. 그러니 을축년 대홍수가 몰고 온 재앙은 말 그대로 미증유였다. 특히 잠실과 송파 지역은 홍수로 물바다가 되다시피 했다. 당시 참상이 어떠했는지는 사진 몇 장이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한강 일대 홍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정종 3년(1400)에서 철종 10년(1859)에 이르는 460년 동안 서울 일대 홍수 기록이 170여 회나 된다고 했다. 한강 일대 홍수는 삼국 시대라고 다를 바가 없었던 모양이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던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만 해도 백제본기(371쪽)를 보면 홍수 기록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어 백제 또한 이 때문에 몸살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인들이 그냥 당하고만 있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홍수를 대비해 대규도 제방 공사를 벌였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이런 빈번한 홍수 기록을 근거로 지금까지 한강과 바로 접하고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많은 논리적 맹점을 안고 있다. 설사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었다고 치자. 그러면 백제인들은 왜 왕성 아닌 다른 성은 강가에다 세웠겠는가. 왕성이 강에 떠내려갈까 두려웠다면 왕성 아닌 다른 성에 대해서도 홍수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다.

이와 관련해 경주 월성과 부여, 공주, 국내성, 평양, 장안성 등의 우리나라 고대 도성이 하나같이 강가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풍납토성이 한강변에 있다고 해서 도성일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 주고 있다. (372쪽)

 
***

이상 김태식,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0 관련 대목을 전재한다. 

아마 참고문헌에서 있을 텐데, 관련 기술은 서울600년사인지를 절록한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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