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갈승개(曷勝慨)", 팔순 영조의 한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3. 8.
반응형

늙으면, 특히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할수록 강개(慷慨)함을 이기지 못하기는 만승(萬乘), 혹은 천승(千乘)의 군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지위와 권력이 높을수록 이 강개함은 더 농밀한 모습을 그런 일에 처한 사람들이 더 보이는 듯하다. 나야 그런 처지가 아니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 숙종 20년(1694)에 나서 이복형 경종이 죽자 1724년 왕위에 올랐다. 1776년까지 재위하다가 죽었으니, 재위 기간이 물경 만 52년에 달하고 향년 또한 만 82세 기록적인 장수를 기록한다. 이름이 금(昑)이지만, 아마 이 본명으로 불린 일은 여든 생평에 몇 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숙종 혹은 형 경종 정도가 "금이야" 하고 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송강호가 영조로 출연했다.



피붙이요 적자이며 차기 대권주자인 사도를 세자로 책봉했지만, 한때는 제법 똑똑하단 소리까지 들은 이 아들이 이내 못난 놈이 드러나고, 각종 광란이 뚜렷해져, 마침내 미친 놈으로 판명나자, 뒤주에 가두어 죽일 수밖에 없던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장자가 요절하고 믿은 둘째가 사라지자,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손자 산(祘)이밖에 없었으니, 사도가 사라진 1762년, 이미 칠순을 바라보는 上노인 축에 든 영조한테 불행은 장성한 손자한테 물려주기 위해서는 아마 그 칠십 성상보다 더 질긴 삶의 고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랬다. 영조는 죽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10년 이상은 더 버텨야 손자가 장성한다. 그래야 신하들이 발호하지 못하고 궁중 골방 여인들이 판을 치지 못한다. 그렇게 영조는 질긴 삶을 이어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던 영조. 


그런 그도 이제 팔순 즈음이 되면서 맥이 풀리고 말았다. 손자놈이 장성했으니, 더구나 살피니 그런 대로 제왕 재목감은 되는지라, 이만하면 되었다. 넋을 놓는 순간, 회의가 물밀듯이 찾아왔다. 


영조 글씨



영조는 자신한테 물었다. 


"제왕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산다는 게 무엇인가?" 


강개(慷慨)는 그렇게 검버섯과 함께 늙은 영조의 피부를 파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잔소리가 많아졌다. 뭔가 삶의 끈을 놓으려는 욕망만큼이나 살고 싶다는 욕망도 컸다. 하지만 몸은 이내 축축 늘어져만 갔다. 이 두 욕망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는 공간에서 잔소리가 쏟아졌다. 한탄이 쏟아졌다. 비분悲憤이 폭발했다. 


그러다가 이내 영조는 눈을 감았다. 

    


<영조가 털어놓는 조선 국왕의 속내>

한중연, '영조어제' 해제집 발간 시작 


2011.08.25 17:02:23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영조는 조선시대 국왕으로는 2관왕 타이틀 보유자다. 장장 53년에 달하는 재위기간과 83년에 달하는 생존기간 모두 조선 국왕으로 최장(最長)이다. 


그리고 워낙 호학(好學)의 재질이 있었던 까닭에 직접 남긴 글이 무려 5천400여 편을 헤아린다. 이는 누구보다 많은 글을 홍재전서라는 전집 형태로 남긴 그의 손자 정조를 능가할 수 있는 규모다. 


영조가 아들 사도한테 준 글



부설 도서관인 장서각에 영조어제(英祖御製)라는 이름으로 영조가 남긴 글 대부분을 소장한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정정길. 한중연)이 2006년 연구팀을 출범시켜 정리 작업에 들어간 지 5년 만인 최근 그 구체적 성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영조가 남긴 글 하나하나가 어떤 내용을 담았으며, 언제 썼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형식이 어떠한지 등을 정리한 '영조어제 해제'집 시리즈 전11권 중 첫 번째 결과물로 제1~3권을 최근에 발간한 것이다. 


연구책임자인 권희영 한중연 교수는 "영조는 말년에 갈수록 창작 횟수가 늘어나 1774년 한해만 해도 1천336편에 이르는 글을 쓸 정도로 글에 대한 집착과 욕구가 대단했다"면서 "특히 말년에 이를수록 오로지 감회를 읊조린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영조가 남긴 글에는 과거를 돌아보며 심회를 서술한다든가 자신의 건강과 정국 등을 자주 슬퍼하거나 탄식하는 논조가 자주 드러난다고 권 교수는 전했다.


일례로 이번 해제집에 수록된 어제갈승개(御製曷勝慨)라는 글이 이에 해당한다. 


영조가 세손 정조한테 준 글



81세 때인 재위 51년(1775)에 쓴 이 글에서 영조는 구절마다 "어찌 강개함을 이기리오"(曷勝慨)나 "다만 스스로 탄식할 뿐"(只自歎)이라고 하는가 하면, 서두에서는 "나는 어떤 사람이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소년 시절 그려보니 마치 전생 같네"라고 읊었다. 


또 팔순인 재위 49년(1773) 자신의 어진(초상화)을 그리는 도사도감(圖寫都監)이 설치되자 그 해 6월14일 어제금팔순성명연(御製今八旬誠命然)을 지어 출생에서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력을 감정을 표출하면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이번 해제집에 수록된 글 중 같은 재위 49년째에 80세를 맞아 자기 치적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 4언8구체 율문은 영조가 국정 운영의 중심을 어디에 두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어제문업'(御製問業)이란 제목의 이 글에서 영조는 ▲ 당쟁을 막으려 한 탕평책 ▲ 균역이 승려에게까지 고루 미치게 한 균역법 ▲ 만세에 남길 업적이라는 청계천 준설 ▲여자종에 부과되는 공역 폐지 ▲ 서얼에 청요직 개방 ▲ 속대전 편찬을 자신의 여섯가지 치적으로 꼽았다.


이 중에서도 탕평책과 균역, 그리고 준설은 영조의 치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나머지는 영조 자신이 중시한 국정 개혁의 중점 과제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연구팀은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