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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지리산에서 기르는 호연지기? 중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쿠션 여행

by taeshik.kim 2019.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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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 남원(南原), 자(字)가 자점(子漸), 호(號)는 제호(霽湖)ㆍ점역재(點易齋)ㆍ요정(寥汀)ㆍ태암(泰巖)인 양경우(梁慶遇, 1568~1638)는 부친과 더불어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로가 인정되어 서얼임에도 30세인 선조 30년(1597)에 참봉으로 문과 별시에 급제하고, 광해군 8년(1616)에는 문과 중시에 뽑혔다. 


다만, 신분에 따른 차별은 많았던 흔적은 농후해 결성(結城)ㆍ해미(海美)ㆍ장성(長城) 현감 같은 낮은 급 지방관을 전전하고, 내직으로는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와 봉상시 정(奉常寺正)을 지냈을 뿐 고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시문에 뛰어나다 해서, 그런 쓰임이 있을 때는 중용받기도 했다. 


양경우는 지금의 전라도 장성 땅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오산현감(鰲山縣監)으로 재직 중이던 광해군 10년 무오(1618), 지리산을 주유한다. 이때 유람기가 그의 시문집 《제호집(霽湖集)》 권 제11 기행록(紀行錄)이 저록한 <연해(沿海)의 군현을 모두 돌아보고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에 들어가 쌍계사(雙溪寺)와 신흥사(神興寺)를 구경한 기행록〔歷盡沿海郡縣 仍入頭流 賞雙溪神興紀行錄〕>이 그것이다. 


중국 사천성 아미산 가마. 걸어 산을 오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교통운반 도구다. 조선시대 양반 권세가들의 등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비교자료다.


이에 의하면, 양경우는  윤 4월 15일 계유에 행장을 꾸려 유람에 나서니, 그의 주요 경력經歷을 보면 영암, 진도, 강진, 장흥, 보성, 낙안, 순천 등지를 거쳐 5월 9일 화계에 도착하고 이튿날 상계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지리산 유람을 시작한다. 쌍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11일 무술일 새벽에 일어나 마침내 등반에 나선다. 이 날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새벽에 일어나 신발을 신고 노소(老少) 승려 8~9명과 함께 절 뒤 절벽을 따라 개미처럼 붙어서 오르는데 여러 중이 나무 남여(藍輿, 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를 가지고 뒤따랐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젊어서부터 명승지를 구경할 도구(건장한 다리)가 없지 않았다. 지금 비록 늙었으나 어찌 너희들에게 수고를 끼칠 정도이겠는가. 그냥 놔두어라” 라고 했다. 몇 리쯤 지나자 자못 피곤하여 젊은이로 하여금 등 뒤에서 밀게 했지만 갈수록 더욱 힘이 들어 돌에 기대앉아 잠시 쉬었다. 한 늙은 중이 있는데 그 이름은 잊었지만 문자를 알아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했다. 그가 뒤에 있기에 내가 불러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심하다! 내가 많이 쇠약해졌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밀게 하여 다닐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야. 이것은 비록 가마는 모면하였으나 아직도 외물에 의지하는 것이니, 어찌 이걸 가지고 스스로 만족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경우는 걸어서 산을 올랐다. 하지만 이내 녹초가 되어 헐레벌떡이다가 기어이 주저앉고 말았다. 


이에서 주목할 대목은 그의 행차에 상계사 중이 10명가량이나 따랐다는 점이다. 우두머리 늙은 중이 있고, 그의 지휘 아래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나머지 승려가 남여(藍輿)를 들고 따랐다. 이 남여가 바로 휴대용 수레요, 가마다. 이어지는 묘사다. 


여기서부터는 여러 중이 가마로 나를 메고 오르고 올라 차츰 멀리 가는데 길이 험난할수록 중들은 더욱 힘들어 했다. 내려다보니 가마를 멘 중들이 마치 소처럼 헐떡거리며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늙은 중이 뒤에 따르면서 피곤함을 책려(策勵)하며 말하기를, “앞길이 멀지 않았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전년에 하동 군수가 산처럼 살이 쪄서 무거웠어도 너희들이 능히 감당하였는데 이번 행차를 어찌 고생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자, 가마를 멘 사람이 대꾸하기를, “하필이면 하동 군수를 말하십니까. 근래에 토포(討捕) 영감은 정말 복이 없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중국 사천성 아미산 가마꾼. 걸어 산을 오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교통운반 도구다. 조선시대 양반 권세가들의 등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비교자료다.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험준한 산이라도 제발로 걸어서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 험준한 길도 가마꾼들이 진 가마에 타고 룰루랄라 하며 올랐다. 누가 짐꾼이었는가? 중들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를 실어나른 중들은 쌍계사 중들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그에 견준다면 요즘 대한민국 '스님'님들은 참말로 편안한 시대를 사신다.  


내친 김에 양경우 증언을 더 따라가 보자. 


잠시 뒤에 중들이 길이 끊어졌다고 고하고, 나를 가마에서 내려 걷게 하였는데 걸어가다가 잔교(棧橋)를 만났다. 이른바 잔교라는 것은 세 줄기의 긴 나무를 엮어 암벽의 틈에 나무의 양 끝을 얽어매고 허공에 걸쳐 간략한 묶음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건너면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데 아래로는 땅이 아득하다. 이런 곳이 세 곳인데 대략 수십 걸음이면 지날 수 있으나, 백혼무인(伯昏無人) 같은 신왕(神王)이 아니면 모두 비틀거리며 기어서 건너니 낯빛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잔교가 끝나자 불일암(佛日庵)이 나타나니 아스라이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단 것 같다. 암자에서 십여 보 거리에 석대(石臺)가 있어 20~30명이 앉을 수 있으니 그 높이는 몇 천 길〔仞〕인지 알 수가 없다. 향로봉(香爐峯)이 왼쪽에 있고 청학봉(靑鶴峯)이 오른쪽에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 있어 웅대하기 짝이 없다.


그 아래에 어두컴컴하여 구름과 나무가 서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중이 말하기를, “옛날에 한 쌍의 청학(靑鶴)이 푸른 절벽 사이에 둥지를 틀고 봄과 여름에 새끼를 기르기 위해 돌아오곤 하였기에 이 골짜기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백 년 동안 왕래가 그치지 않다가 형체와 그림자가 끊어져 없어진 지가 지금 10여 년이 됩니다.” 라고 하였다. 나와 노승은 오랜 동안 탄식을 하였다. 


중국 사천성 아미산 가마꾼. 걸어 산을 오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교통운반 도구다. 조선시대 양반 권세가들의 등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비교자료다. 일정한 구간마다 짐꾼들은 교대한다. 지켜 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폭포가 향로봉의 오른쪽 어깨에서 쏟아져 내려 대의 아래에 이르러 웅덩이를 이룬다. 긴 무지개가 구부려 물을 마시고 흰 띠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데, 벼랑에 부딪히고 골짜기를 돌아 쿵쿵거리는 것이 천둥이 치고 전쟁터의 돌격하는 소리 같아 참으로 절경이다. 대(臺)에서 조금 왼쪽으로 5,6보쯤에 또 대가 있는데, 대 위의 돌에 ‘완폭대(翫瀑臺)’ 3글자가 새겨져 있다. 거처하는 승려는 이것과 석문의 큰 글씨가 모두 최치원 공의 필적이라고 알고 있으나, 신선과 범인(凡人)의 필획은 현격하게 다른 법인데 세상에 진위(眞僞)를 구별할 수 있는 일척안(一隻眼)이 없으니 애석하다. 


배회하는 사이에 어두운 구름이 다리 밑에서 일더니 가랑비가 흩뿌린다. 이슬비가 옷을 적시기에 불일암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천봉만학에 괴이한 나무와 기이한 바위가 구름과 노을이 감고 펼치는 사이에 숨었다가는 드러난다. 정신이 서늘하고 뼈가 오싹하며 쓸쓸하고 그윽하여 신옹(神翁)과 우객(羽客)을 만난 것 같으니 참으로 신선 세계이다. 다만 암자에는 거처하는 승려가 없어 향불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며, 집은 오래되고 비가 새 단청(丹靑)이 희미하다. 산중의 가장 유명한 사찰이 거의 무너지게 되었는데도 손을 대어 중수(重修)하는 사람이 없으니, 선가(禪家)의 쇠박(衰薄)함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잠시 뒤에 비가 그치자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해거름에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아미산 소나무. 절경? 한폭 그림? 그것도 내가 여유가 있어야 동양화지, 피곤해 뒤지겠는데 무슨 절경이리오?



산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 실제 그래야 한다고 맹자는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맹자는 제발로 올랐는가?


그땐 중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고되게 그를 가마에 태워 실어 올랐다. 


맹자 선배 공자는 태산에 올라야 천하가 작음을 안다고 부르짖었다. 태산에 올라봤으니 이런 말 하지 않았겠는가? 마침 공자가 태어나 자라고 출세한 곳이 태산 근처이니 뭐 태산은 비교적 자주 오른 듯하다. 


공자가 제발로 태산을 올랐겠는가? 케이블카 타고 올랐다. 사람들이 끄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다. 


남명 조식은 걸핏하면 지리산을 올랐다. 칼 찬 선비라고 그를 묘사하곤 한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를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호연지기?


남이 매어주는 가마 타고 올라야 호연지기가 나지, 제발로 그 높은 산 오르면 무슨 호연지기리오?

오르다가 중간에 숨이 끊어져 죽고 만다. 


가마 타고 룰루랄라 올라야 호연지기도 생기는 법이고, 절경도 보이는 법이며, 시도 절로 나오는 법이다. 

(이상 제호집 텍스트는 한국고전번역원 역본을 이용했으되, 문맥에 따라 약간 손질한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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