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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준천계첩浚川稧帖, 청계천 준설을 향한 영조의 위대한 여정

by taeshik.kim 201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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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영조한테 꽂혔다. 그렇다고 내가 동전 넣으면 자동으로 무엇을 언제나 새롭게 뽑아내어 주는 벤딩머신도 아닐진댄, 지난날 내가 고혈을 뽑아내 만든 기사 중에 현재도 나름 요긴하다 하는 것들을 재방함으로써 그에 갈음하고자 하니, 뭐 재방송 우라까이는 OCN 슈퍼액션만 하란 법 있는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 영조라고 하면 드라마나 영화 영향으로 이순재나 송강호를 떠올리지만, 젊은날 연잉군은 의외로 호리호리 날렵했다. 요샌 정일우라나 어떻다나?



이참에 소개코저 하는 그와 관련한 사건은 청계천 준설이라, 이 사업을 영조 자신이 얼마나 국정 최대 현안 중 하나로 여겼으며, 그것을 이룩한 자신을 얼마나 대단히 여겼는지는 앞선 이 블로그 글에서 충분하리라 본다. 


청계천은 걸핏하면 범람이지만, 문제는 이는 비가 올 때 얘기고, 갈수기엔 바닥을 드러냈으니, 똥물 범벅이었다. 당시 상하수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거나 운영됐을 리 만무했거니와, 똥물에 갖다 버린 시체 썩는 냄새로 차마 길조차 지나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이를 일거에 영조가 대대적인 사업을 일으켜, 바닥에 쌓인 돌과 흙을 쓸어냈으니, 이것이 일소一掃 아니고 무엇이랴? 


연잉군 시절 영조 초상 전신상




<영조의 청계천 준설 보고서 「준천계첩」>

2004.06.14 15:50:0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왕조실록」 숙종 36년(1710) 9월 5일자 기록에는 이날 한성이 호된 물난리를 겪었음을 전하면서 가장 주된 원인으로 무차별한 산림 남벌을 다음과 같이 지목하고 있다.


"무릇 네 산에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된 뒤로 사석(沙石·모래와 돌)이 흘러내려 봇도랑이 메워지고 물길이 막힘으로써, 가뭄에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는가 하면, 큰비가 내리면 평지까지 물이 범람해 부근 인가가 피해를 보았다".


이보다 약 50년 앞선 효종 5년(1654) 6월 8일자에는 "큰비가 내려  궐내로 물이 넘쳤다. 익사자가 생겼고 삼각산 작은 봉우리가 무너져 내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한성은 왕조 개창 이후 수재와 환경오염 등으로 해마다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개천(開川·청계천)은 골칫거리였다.


어제 보석으로 출감한 이명박이 준설한 현재의 청계천



이에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는 '개천'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을 내렸다. 재위 36년째인 서기 1760년, 개천을 준설하는 대역사를 벌였던 것. 강바닥 토사를 걷어내고 하천을 정비하는 일을 보통 준설(浚渫)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준천'(浚川)이란 표현을 주로 썼다.


이 공사는 「준천계첩(浚川稧帖)」에 잘 나타나 있다.


공사를 위해 준천사(浚川司)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됐으며 공사 최고책임자는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영조는 홍봉한에게 개천 준설작업에 관한 전반적인 개요를 수록한 보고서를 만들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되어 현재까지 몇몇 기관이나 개인에게 전하고  있는 자료가 「준천계첩」.


준설한 청계천을 친히 둘러보는 영조. 준천계첩 한 장면



세종대왕기념관 관장이자 한학자인 이해철(李海哲.70)씨가 심혈을 기울여  「청계천을 가꾸다」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펴낸 책은 필자 개인 소장품인  「준천계첩」에 대한 완전한 번역서이자 해설서이면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공사는 이 해 2월 18일에 시작되어 57일만인 4월 15일에 끝났다.


이를 위해 이를 위해 투입된 인력은 총 21만5천380여 명. 예산은 "전(錢)이 3만5천여 민(緡)이요, 쌀이 2천300여 석"이었다. 


그 자신의 의지로 실행된 대규모 '국책사업'이니 이에 대한 영조의 관심도 지대할 수밖에 없는 법. 3월 10일 광통교 현장으로 행차한 데 이어 공사 막바지인  4월 9일에는 비바람을 뚫고서 다시 청계천을 찾아 오수간문에서 현장을 관람했다.


준천계첩 두 장면. 영조가 오간수문으로 현장을 방문한 장면(위)과 모화관으로 청계천 준설공사 담당 임시관청인 준천소를 방문(아래)한 장면이다.



「준천계첩」에는 청계천 준설 현장을 친히 둘러보는 영조의 행차 장면을 담은 당시 그림까지 몇 장 수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청계천을 가꾸다」는 모든 한문 텍스트는 한글로 옮겼고, 풍부한 주석을 곁들이는 한편, 무엇보다 자료 원본을 실물 크기 대로 영인 수록했다. 청계천 복원공사와 맞물려 이 일대 포진한 조선시대 각 문화재 복원 논란이 한창인데 때마침 귀중한 자료가 선보였다. 열화당 刊. B4변형, 특수양장. 120쪽. 6만원 <사진있음>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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