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注 - 아래는 《고려성의 역사성 고찰과 복원계획 수립 학술용역 보고서》 (강릉시·강원고고문화연구원, 2022)를 발췌한다. 원의는 훼손하지 않고 문장은 손댔다.
하도 동해안 쪽 관심은 적은 듯해서 열불 나서, 말갈론 여진론을 토대로 깔아 정리한다.
강릉 고려성은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508-1 일원에 위치하는 석성石城이다. 성 동쪽에는 안인항과 정동진을 잇는 7번국도(율곡로)와 동해안에 접하고, 서쪽에는 괘방산이 남북으로 능선을 길게 뻗었으며, 남쪽에는 정동캐슬과 하슬라미술관이, 북쪽 약 300m 지점에 등명낙가사가 있다.
율곡로에서 등명낙가사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관광안내도 옆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길(괘방산로)이 있으며, 길을 따라 약 460m를 이동하면 민가와 인접하여 고려성 서벽이 드러난다.
이 성은 괘방산(339m)이 동해안 방향으로 뻗어내린 해발 70~90m 가지봉 정상(해발 94.9m) 평탄면에 위치한다. 성곽이 산 정상부를 감싼 이른바 테뫼식 산성에 속하며, 공중에서 내려다 본 평면은 방형에 가깝지만 동쪽이 넓은 사다리꼴을 띤다.
성 안쪽 지형을 보면 서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으며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북서쪽 정상부 평탄지(93.5m)다. 비고차는 북-남 20~30m, 서-동 5~20m 정도로 서-동 편차가 크다.
바닷가 구릉에 위치한 해안성인 이곳은 강릉 지역에 소재하는 성곽 중 해안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동해안을 관망하기 유리해 해안경계와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생각된다.
그 흔적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 이후 편찬된 여러 지리지에서는 보이지 아니하고 성곽을 사용한 기록도 없다. 이로써 본다면 조선 후기에는 이미 기능을 다했다.
동해안 지역은 1011년(현종 2년) 이후 약 90여 년간 동여진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어려움을 겪었고, 1372년(공민왕 21년)부터 1389년(공양왕 원년)까지는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 약탈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강릉 고려성은 고려시대 서·남해안 지역에 축성된 성곽들과 같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 오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보물고적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는 “둘레 약 4백 칸”이라 했, 《임영강릉명주지臨瀛江陵溟州誌》에는 “축성연대와 규모는 미상”이라 하였으며, 《문화유적총람 上》에서는 고려성과 등명낙가사와의 관련성과 현황을 기록하였다.
1992년 《전통사찰총서1》에서는 고려성이 인근 등명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89), 1998년 강릉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청자편과 어골문 기와편을 비롯한 고려시대 유물이 수습되어 고려시대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현황조사와 정밀현황측량을 통해 확인한 성곽 규모는 둘레 478m, 면적 13,494㎡. 현재는 남벽과 서벽 일부구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훼손이 심하게 진행된 상태.
성 내부는 서-동 방향 등고선을 따라 3~4개 축단 대지가 확인된다.
성벽 축조방법을 잔존상태가 양호한 남서쪽 구간을 중심으로 보면, 풍화암반층을 일부 깎은 다음 길고 납작한 돌로 1~2단 정도 수평하게 쌓아 바닥을 만든 다음 길이 50cm 안팎인 깬돌과 강돌로 허튼층쌓기(난층쌓기)로 외벽을 만들었다.
성돌 사이 공간에는 잔돌을 끼워 넣은 모습이 확인된다. 내벽은 흔적은 명확치 않으나 외벽 안쪽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넣은 모습이 확인된다.
성 북서쪽 꺾이는 지점에 인접한 서문 터에서 남서쪽 꺾인 지점에 이르는 서벽은 길이 63m. 이 중 약 28m 구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았다. 높이는 2m 안팎으로 12단가량 잔존한다.
남벽은 남서쪽 회절부에서 남동쪽 회절부에 이르는 구간으로 길이는 139m. 이중 약 62m 구간 성벽이 잘 남아 있는데, 18단 가량 잔존한 상태이며 잔존높이는 남서쪽구간이 약 2.5m, 남쪽구간은 약 5m.
동벽은 남동쪽 회절부에서 북동쪽 회절부에 인접한 동문지에 이르는 구간으로 길이 약 134m. 이중 약 16m 가량 성벽이 남았지만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는 않다. 외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무너진 성돌로 하단 성벽은 확인되지 않는다.
북벽은 성 북동 회절부에 인접한 동문지에서 서문지까지 구간으로 길이는 약 103m. 이중 약 9m가량만 성벽이 확인되나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외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린 상태이며 무너진 성돌로 하단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성벽은 잔존구간에서 약 6~7단이 잔존한다.
확인된 문 터는 총 2개소. 성 북서 회절부(서문지)와 북동 회절부(동문지)에 위치한다.
서문지는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북서쪽 회절부에 설치되었으며, 그 북쪽에 용도를 시설했다. 폭은 약 8.8m이며 잔존하는 남측벽 높이는 약 2m이고, 문지 외측에 초석 2매가 확인되었다.
초석 상면 지름은 약 120~130cm이며, 주칸거리는 3.5m. 초석 앞에는 남-북 방향 석렬이 확인된다.
서문지 북쪽 능선을 따라 용도를 두어 성벽을 보호하고 산 밑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막기 위한 시설을 조성했다. 용도는 길이 약 15m, 폭 약 2m이며 북쪽 약 8.8m만 벽체가 잔존한다.
동문지는 성벽 북동회절부에 위치한다. 폭은 약 2.5m이며 대부분 무너져 내려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동문지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면 주변이 비교적 평탄한데, 동문의 출입과 관련된 건물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는 크게 2개소로 북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다.
북서쪽 건물지는 성 내에서 가장 높은 지점(93.5m)에 해당하며, 서문지에서 동쪽으로 약 10여m 떨어져 있다. 평탄지 주변에는 석축이 확인되며, 내부에 초석 1매가 남아 있어 건물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북동쪽 건물지는 동문지 주변에서 확인되며 기와편 등의 유물이 다수 확인된다. 이밖에 남쪽 성벽 주변에서 청자편, 백자편, 도기편 등이 다수 확인된다.
현장조사 시 지표에서 수습한 유물은 기와편 5점, 토기 3점, 분청사기 1점 등 총 9점이다. 기와류는 동문지 주변에서, 토기 및 분청사기는 남벽 주변 추정 건물지에서 수습하였다.
이 고려성은 등명락가사와의 관련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등명락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해적을 불심으로 막기 위함이라는 창건 목적을 갖고 있다. 곧 강릉 고려성을 축조할 당시 등명락가사는 존재하고 있었다.
사찰에는 중요 물품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고, 이때문에 도적들의 주요 약탈 대상이 되었으며, ‘등명사(燈明寺, 고려초에 재건될 당시 등명락가사의 이름)의 중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거나 ‘일제강점기 때에 강릉 고려성에서 금불상이 출토되었다’는 구전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강릉 고려성과 등명락가사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강릉 고려성은 1998년 강릉대학교박물관 지표조사 내용을 토대로 학계에 소개되었으나, 아직까지 조사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며, 앞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좀 더 진행되면 동해안지역 해안방어시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두 차례 지표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조선전기까지 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비슷한 운영시기를 갖는 주변 관방유적은 약 15개소로 추릴 수 있다.
이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그 현상이 비교적 명확히 밝혀진 유적은 강릉읍성, 석교리토성, 강문동토성 등이 있으며, 나머지는 지표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모습만 확인되었다.
이곳을 포함해 영동지방 고려시대 성곽이 모두 동해를 조망하기 유리하게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겨냥하는 바가 곧 여진이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영동 영서로 나눌 적에 동시대 성곽이 압도적으로 영동 지방에 많다는 사실에서도 간접 확인한다.
이는 결국 고려가 얼마나 동해안 루트로, 그것도 해상을 통해 침입하는 여진을 고심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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