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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개간, 산림파괴, 말라리아 (1)

by 초야잠필 2019.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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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말라리아 병원체는 현미경이나 써야 보이는 탓에 박테리아 혹은 바이러스로 알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는 원충류(protozoa)로서 기생충 질환의 일종이다. 


말라리아도 기생충이니 생활사 (life cycle)가 있다. 

말라리아 생활사를 보면 모기에 기생한 단계. 사람에 기생한 단계로 크게 나누어지고 사람에 들어와서도 간에 서식하는 단계, 적혈구에 서식하는 단계로 나누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라리아는 반드시 모기에 물려야 감염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감염은 없다. 

https://www.cdc.gov/malaria/about/biology/index.html 에서 전재. 


지금도 열대지역 여행 때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 말라리아 약. 우리나라 학질*과 달리 열대지역 말라리아는 지금도 매우 위험하다.

*우리나라 말라리아는 Plasmordium vivax라고 부르는 원충으로 열대지역 말라리아와 병원체 종이 다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말라리아를 호칭하는 명칭이었던 "학질"은 P. vivax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P. vivax는 분포 범위가 넓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아 사망에까지 이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말라리아라고 하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열대지방을 여행하는 해외여행에 관련해서나 걸리는 병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말라리아는 우리 역사상 아주 오랫동안 이 땅에서 번성한 감염성 질환의 하나다. 흔히 "학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례 중 역사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말라리아 감염 보고는 고려시대에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122년 고려 인종 초 이영이라는 이는 숙종때 을과에 급제하고 인종 초년에 보문각 학사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당시의 권신 이자겸이 이영을 진도로 귀양 보냈는데 그 늙은 어머니는 관청의 노비로 만들었다. 그 소식을 배소에서 들은 이영은 술을 한말이나 마시고 분이 복받쳐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길가에 묻었는데 그 후 혹 학질에 걸린 사람이 그 무덤에 기도를 드리면 병이 떨어지곤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 97, 열전 10, 이영. 대한감염학회 편 한국전염병사에서 전재). 


1196년, 고려 명종조 기록에는 이규보가 상주지방에 갔다가 병에 걸려 앓아 누웠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기록에 의하면 이규보가 걸린 병의 증상이라는 것이 "한번 한기가 들어온 후 갑자기 대열이 치솟아 각종 고통을 당하는"것인데 현재 임상적으로 파악하는 말라리아와 증상이 유사한 것이다 (한국전염병사). 


이처럼 말라리아는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 존재한 감염성 질환이지만 우리 사회가 1960년대 이후 빠르게 산업화하면서 말라리아 감염률이 점점 줄어들어 70년대에는 사실상 말라리아가 박멸된 상태에 들어갔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약 20년간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풍토병 (endemic)으로서의 말라리아가 사라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어느날, 1993년-. 


20년간 잠잠하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다시 시작되었다. 해외여행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한국에 귀국한 후 발병하는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말라리아가 국내에서 자생적한 풍토병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관련 환자 보고가 계속 잇따르고 그 환자의 발생이 비무장지대 인근 지역에 집중하는 것이 확인 되면서 이 말라리아는 한국사회 자체에서 발생한 풍토병 질환이라는 것이 점점 확실해 졌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 환자 분포 지역. 휴전선 이남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연하다. 최근에는 90년대 이후 말라리아는 북한에 만연한 말라리아가 남진한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인용논문은 https://www.ncbi.nlm.nih.gov/pubmed/20207868


학질이라는 것이 최소한 고려시대 이후에는 확실히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풍토병이었고 휴전선 남쪽 지역에서 70년대 이후에나 발병이 사라졌다면 북한의 경우 말라리아 감염이 조선시대 이후 중단 없이 계속 발병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말라리아라는 것이 이를 매개하는 모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므로 말라리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모기가 휴전선 북쪽에서 날라온다면 남쪽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말라리아는 언제나 다시 풍토병화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1993년의 말라리아 재출현은 북한의 말라리아 모기들이 남하하여 초래한 결과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었다. 

2019년 현재. 말라리아 감염은 남한 사회에서 다시 풍토병화 한 상태이며 해외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걸릴 수 있는 질병이 되었다. 

자, 이제 우리나라 말라리아 감염사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말라리아 감염이 급감한 것은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부터이지만 과학적 기법으로 제대로, 효과적으로 통제 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미군정 시기 이후부터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때 말라리아 감염때문에 전쟁 초반 굉장히 고생을 했다. 서쪽으로 진군하면 할수록 말라리아 감염이 늘어 싸우기도 전에 전력 손실이 막대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어 가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말라리아 감염을 통제할수 있는 기술적 노하우를 미군은 이후 계속 축적해 갔는데 이 예방법은 1945년 종전 즈음에는 매우 효과적인 확실한 기법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이렇게 말라리아 감염을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미군의 기법이 해방이후 군정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적용되었는데 이것이 나이 드신 분들 사이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DDT"로 상징되는 살충제 살포 및 습지 관리 기법이다. 


2차대전과 그 직후 DDT는 감염병 예방에 관한 한 만병통치약이었다. 

(https://bracingviews.com/2016/09/16/u-s-military-strategy-of-ddt-bug-zappers-lawyers-guns-and-money/)

말라리아는 모기를 매개로 하는 만큼 모기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면 성공적으로 말라리아 감염은 퇴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사실 종전 이전 일제시대라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정의 말라리아 감염대책이야 말로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될 수 있을 정도로 효과적인 말라리아 통제책의 시작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인석, U.S. Military Administration’s Malaria Control Activities (1945-1948), 의사학). 

지금이야 DDT의 문제점이 지적되어 사용이 금지 된 상태이지만 이 살충제가 처음 개발되었을때 인류는 열광했다. 이 당시 DDT에 대한 평가는 이 살충제의 개발자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DDT를 발명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뮐러. 발명후 불과 9년만에 노벨상을 받았다. 처음 소개 되었을때 DDT가 얼마나 열광적인 반응을 받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뮐러가 노벨상을 받은것이 1948년이니 한국전쟁 전후하여 미군이 한국에 사용한 DDT는 당시로서는 가장 각광받고 검증된 의약품이었던 셈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aul_Hermann_M%C3%BCller

아무튼 1970년대부터 말라리아가 완전히 한국에서 사라졌던 것은 미군정기에 시작된 예방의학적 관리기법과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 의료수준의 향상이 결합하여 낳은 결과였던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DDT 살포 중.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img_pg.aspx?CNTN_CD=IE001845427&atcd=A0002123068

미군정시대에서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태평양 전쟁 시기를 거쳐 일제시대에 가 닿는다. 

이 시기 말라리아 감염은 어떠했을까? 여인석 선생의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이미 오키나와나 타이완과 같은 지역에서 말라리아 관리 경험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경험들이 조선의 말라리아 관리에도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말라리아가 최우선적인 해결과제였던 이들 지역과는 달리 조선의 말라리아는 다른 급성전염병이나 결핵 등과 같은 질병에 비해 적극적으로 관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 관리를 위한 여력이 없어지고 또 위생 상황이 악화되면서 말라리아의 발병은 다시금 증가한다. (학질에서 말라리아로 : 한국 근대 말라리아의 역사(1876-1945), 의사학 제 20권).


실제로 일제시대에는 말라리아 감염률 자체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시기에는 말라리아 감염률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일제시대의 말라리아 감염에 대해 특기할 사실은 이 시대에 말라리아 감염률이 줄어들었다는 점보다 오히려 말라리아 치료제가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일제시대 말라리아 감염에 대한 행정기관의 대책은 예방보다는 발생 후 치료쪽에 집중해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여인석 선생의 같은 글을 조금 더 보도록 하자. 

"말라리아에 대한 행정 당국의 일차적인 대처는 환자에 대한 키니네 투여였다. 충남도의 경우 위생국이 앞장서 합리적 요법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동시에 각 주재소에 이 병에 특효약인 금계랍 1만인 분량의 약을 무료로 배부하여 1933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7천 명에게 투여하였다. 다른 도에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는데 감염자 가운데는 나이 어린 유소년들이 많아서 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키니네를 복용시키기도 했다. 키니네, 즉 금계랍은 말라리아의 특효약으로 키니네를 일주일 이상 복용하면 대개의 경우 완치되었다." 

말라리아에 대해 금계랍이 얼마나 신통한 약이었는지는 매천야록의 기록을 봐도 잘 알수 있다. 

"우두법이 들어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金鷄蠟)이 들어와 노인들이 수(壽)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나왔다."('매천야록')" (계속)


금계랍 광고 (동아일보 1928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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