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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경명왕(景明王)

by Herodopedia taeshik.kim 2018. 4. 9.

신라 제54대 왕의 시호다. 재위 917∼924년. 박씨이며 본명은 승영(昇英). 제53대 신덕왕 아들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신라는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 나라는 후백제와 고려로 삼분되었다. 죽어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명왕 : 경명왕(景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영(昇英)이고 신덕왕의 태자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다. 원년(917) 8월에 왕의 동생 이찬 위응(魏膺)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유렴(裕廉)을 시중으로 삼았다. 2년(918) 봄 2월에 일길찬 현승(玄昇)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했다. 여름 6월에 궁예 휘하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해 태조(太祖·왕건)를 추대하므로 궁예가 달아나다가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이라 일컬었다. 가을 7월에 상주(尙州)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했다. 3년(919) 사천왕사(四天王寺) 흙으로 만든 상(像)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개가 마치 개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냈다.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찬(角)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4년(920) 봄 정월에 왕과 태조가 서로 사람을 보내 우호를 맺었다. 2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했다. 겨울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進禮)에까지 진군하였으므로,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군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듣고서 돌아갔다. 5년(921)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하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소’라고 했지만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란 어떤 보물이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했다. “제가 일찍이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란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이온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게 했지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논한다. 옛날에 명당(明堂)에 앉아서 나라에 전해져 오는 임금의 인장(印章)을 쥐고 구정(九鼎)을 진열해 놓는 것을 마치 제왕의 장한 일인 것처럼 했다. 그러나 한공(韓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한 터전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三器]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 가지의 기물을 세워 놓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의 말이 아닐까?』 하물며 이 신라의 이른바 세 가지 보물이라는 것도 역시 인위적인 사치에서 나왔을 따름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어찌 이것이 필수적이겠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제후의 보배는 세 가지가 있는데, 토지·인민·정사(政事)가 그것이다.』라고 했으며, 초서(楚書)에 이르기를 『초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을 보배로 여긴다.』고 했다. 만약 이를 나라 안에서 행한다면 한 나라를 착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밖으로 옮긴다면 온 천하를 윤택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또 그 밖에 무슨 물건을 말할 것인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물어보았을 따름이지 숭상할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 2월에 말갈 별부(別部)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했다. 그때 태조의 장군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해 그들을 크게 깨뜨리니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했다. 왕이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해 태조에게 감사했다. 여름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고 가물었다. 6년(922) 봄 정월에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이 태조에게 항복했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생각하여 원봉 본래 성(城)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順式)에게는 성(姓)을 내려 왕씨(王氏)라 했다. 이 달에 진보(眞寶)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했다. 7년(923) 가을 7월에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량문(良文) 등이 태조에게 항복했다. 왕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參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장종(莊宗)이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8년(924) 봄 정월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역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창부시랑 김악(金岳)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조의대부(朝議大夫) 시위위경(試衛尉卿)의 관작을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은 박씨다. 이름은 승영(昇英)이다. 아버지는 신덕(神德)이며 어머니는 자성(資成)이다. 비는 장사택(長沙宅) 대존(大尊)  각간이니,  추봉된 성희대왕(聖僖大王) 아들이다. 대존(大尊)은 곧 수종(水宗) 이간의 아들이다.  정축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황복사(皇福寺)에서 화장하고 뼈는 성등내산(省等仍山) 서쪽에다 흩어 뿌렸다.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제12) 경애왕 : 경애왕(景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위응(魏膺)이고 경명왕 친동생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은 박씨인데 이름이 위응(魏膺)이다. 경명(景明)의 모제(母弟)다. 어머니는 자성(資成)이다. 갑신년에 즉위해 2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경명왕(景明王) :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戊寅·918)에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 속 개가 울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나절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울었다. 7년 경진(庚辰·920) 2월에는 황룡사탑 그림자가 금모(今毛) 사지(舍知) 의 집 뜰안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서서 비쳐 보였다. 또 10월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신라 군신(君臣)들이 망해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신라 서울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하니,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일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 소리에 호응하는 일과 같으며, 종달새가 매 죽지를 찢으려 드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백성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와 사직을 빈 터전으로 만들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을 가지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유(說諭)했더니 뜻밖에 간신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났소. 이에 경명왕(景明王) 외종제(外從弟)이자 헌강왕(憲康王)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있게 만들었소.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 듣고 온갖 계교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가지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또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이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흥륜사(興輪寺) 벽화(壁畵)와 보현(普賢) :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 남문과 좌우 낭무(廊廡)가 불 탔는데 이를 수리하지 못해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중이 장차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 했다. 정명(貞明) 7년 신사(辛巳·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니 전탑(殿塔)과 풀·나무·흙·돌 등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연못 어룡(魚龍)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이를 보고 전에는 일찍이 없던 일이라고 경탄해 옥과 비단과 곡식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장이들도 스스로 와서 하루가 안 되어 이루어졌다. 역사를 마치자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이 두 중이 아뢰었다. "천제(天帝)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을 여기에 남겨 두어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천제가 말했. "내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현화(玄化)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니 저 보살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고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普賢菩薩)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도 이 화상은 남아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 경덕왕(景德王)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먼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저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삼국유사 제5권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해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했다. 그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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