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시대에 백악白岳은 금산禁山으로 벌목, 채석 등을 할 수 없도록 법제화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찰도 들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사찰이 운영되었으니, 《세조실록》 7년 5월 1일 경자 기사에 따르면,
5부五部에서 도성 안팎의 신구新舊 사사寺社를 기록하여 올리니, 명하여 백악산白岳山의 북초암北草庵·연굴암衍窟庵·동초암東草庵을 헐고, 백악산 바위 굴에 사는 중 해심海心을 쫓아냈다.
고 했다.
이로써 세조 때까지만 해도 백악에는 북초암, 동초암, 연굴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확실하게 사찰은 없앤 듯하다.
반응형
'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모랑 마누라한테 매 맞고도 버틴 사위, 삼청동三淸洞 연굴사演窟寺 (1) | 2021.03.28 |
---|---|
[淸] 왕원기王原祁(1642~1715) 《도원춘주도桃源春晝圖》 (0) | 2021.03.24 |
장성 행주기씨 대종가의 의친왕 이강 글씨 (0) | 2021.03.07 |
우물안 개구리가 논하는 천하 (0) | 2021.03.05 |
500년전 행주기씨가 보던 책이 일본 동양문고에 (0) | 2021.03.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