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에 이렇게 쓰였으니, 훌륭한 분이 말한 바이니 믿고 따르는 이를 많이 본다. 이런 이를 가리켜 눈 뜬 장님이라고 한다.
책을 읽을 땐 반드시 쓴 목적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으면 그 저자가 판 함정에 빠진다. 더 가관은 그 함정에 빠진 개구리가 하늘을 논한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의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는 사료를 읽는 전근대인의 자세를 옅볼 수 있다. 그러나 사료를 보는 자세로는 불완전하다.
천하의 일이 대개 10분의 8~9쯤은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서(史書)에 나타난 바로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이 그 시기의 우연에 따라 많이 나타나게 되고, 심지어 선악과 현불초의 구별까지도 그 실상을 꼭 터득할 수 없다.
옛날 사서를 편력하여 상고하고 모든 서적을 방증(旁證)하여 이리저리 참작하고 비교해 보니, 오로지 한 서적만 믿고서 단정할 수 없겠다. 옛날 정자(程子 정이)는 사서를 읽다가 한 반쯤 이르러서 문득 책을 덮고 한참동안 생각하여 그 성패에 대한 실상을 짐작한 후에야 다시 읽었고, 또 사실이 잘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그 중간에 씌어진 사실이 다행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불행히 실패된 것도 있으니, 대개 그 사실이 맞지 않는 곳이 많을 뿐더러 맞는 곳도 역시 준신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사서란 것은 모두 성패가 이미 결정된 후에 지은 까닭에 그 성패에 따라 곱게 꾸미기도 하고 아주 더럽게도 만들어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또 선(善)에 대해서는 허물을 숨긴 것이 많고, 악(惡)에 대해서는 장점을 꼭 없애버리는 까닭에, 어리석고 슬기로움에 대한 구별과 선과 악에 대한 보복도 상고할 점이 있을 듯하다. 그 당시에 있어서는 묘책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졸렬한 계획도 우연히 들어맞게 되었으며, 선한 중에 악도 있었고 악한 중에 선도 있었다는 것을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천재(千載)나 멀어진 후에 어느 것을 좇아 그 참으로 옳고 그름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사서에 따라 그 성패를 짐작하면 사실과 이치가 그대로 맞는 곳이 많고, 오늘날 목격한 것을 따라 생각하면 10분의 8~9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나의 지혜가 밝지 못해서 그렇게 될 뿐 아니라 바로 천행으로 이루어지는 점을 이용한 것이 많기 때문이며, 또 오늘날에는 일이 이치에 어긋남이 많을 뿐만 아니라, 옛날 사서도 역시 참[眞]이 어려웠던 때문이다.
나는 이 때문에 천하의 일은 시대를 잘 만나는 것이 최상이고, 행ㆍ불행(幸不幸)은 다음이며, 시비(是非)는 최하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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