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5 08:00:05
"고구려 공략 유주자사는 '무구검'"
日역사학자 '무구검 비석' 분석
소위 '관구검' 기공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장수로 지금의 베이징 일대를 통치하던 지방장관이자 주둔군 사령관인 유주자사幽州刺史로 있으면서 동천왕東川王이 재위하던 서기 244-245년 고구려를 침공해 초토화시킨 사람은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毋丘儉'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중국에서 발견됐다.
일본의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다나카 도시아키 田中俊明 일본 시가현립대학 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 '한국의 고고학' 2008년 가을호(통권 9호)에 투고한 '유주자사 이름은 '관구검'이 아닌 '무구검'이다'는 글에서 중국 산시성山西省 성도省都인 타이위안太原 소재 도관道觀(도교사원)이자 박물관인 순양궁純陽宮에 소장 중인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를 직접 조사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나카 교수에 의하면 이 조상비는 '무구검' 손자인 '무구오毋丘奧'가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일족을 중심으로 만든 비로서, 원래는 '무구검' 출신지인 지금의 산시성 원시현聞喜縣의 구촌邱村이란 곳에 있었다. '무구검'은 고구려 정벌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그 뒤 위 왕실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됐으며, '무구' 두 글자가 성(姓)이다.
다나카 교수는 "손자가 할아버지의 진혼鎭魂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이 비석 뒷면에는 비를 만드는 데 참가한 사람들 명단이 '읍자邑子'라는 말 아래에 기록했다"면서 "이들 명단을 보면 '무구아부毋丘阿扶', '무구계비毋丘季妃', '무구미광毋丘媚光' 등의 글자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다나카 교수에 의하면 이들 '무구씨' 사람들은 당연히 '무구검'과 가까운 일족이었을 것이므로, '관구검' 또한 이제는 '무구검'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정벌한 위나라 장수를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이라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관구'와 '무구'의 '관'과 '무'라는 글자가 대단히 흡사한 데서 비롯됐다.
'관구검'이라고 읽을 때의 '관' 자는 '관통'을 의미하는 '貫'이라는 글자의 본래 글자로서, 부수자로 사용되는 '貝'자가 없는 형태[毌]다. '무구검'이라고 할 때의 '毋' 자와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가깝다.
역사학계에서 '관구검'이 대세인 속에서도 '무구검'으로 보아야 한다는 소수설이 존재한 까닭이 이 때문이었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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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도가 있은지 얼마 뒤, 나는 산서성 일대를 여행할 기회가 있어, 태원에 들린 김에 이 순양궁에 가서 문제의 저 비석을 직접 보고는 조사하기도 했으니, 살피니 다나카 교수의 주장이 옳음을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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