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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광교산이 품은 서봉사지 2.9 x 2.4미터 석축기단의 실체

by Herodopedia taeshik.kim 202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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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瑞鳳寺址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중 하나가 여타 사찰 터가 그렇듯이 입지조건이라, 어떤 자리에 어떻게 똬리를 틀고 있느냐가 중요하거니와, 예서 관건은 저와 같은 산중 사찰이 대체 무엇으로 먹고 살았느냐 하는 의뭉함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저와 같은 사찰이 창건 혹은 번성하던 무렵 저에는 적지 않은 승려와 보살이 상거했을 것이로대, 그들이 이렇다 할 농토도 없는 데서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인가 물주가 있었을 것이로대, 그 영업기반이 무엇인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다. 

 

 

수원과 용인 경계를 이루는 광교산(해발 582미터)과 그 인근 수리봉 남쪽 기슭에 똬리를 틀었다. 대략 해발 300미터 지점 아닐까 하는데, 그 전면에는 비로봉과 형제봉이 위치한다. 서봉사는 광교산과 이 형제봉을 뚫은 계곡에 위치한다. 현장에서 보면 형제봉이 우뚝하다. 

 

 

우선 서봉사瑞鳳寺라는 이름을 풀어보면 실은 역전 앞과 같은 표현이라, 봉황 중에 서징瑞徵 아닌 것이 없으리로대 굳이 瑞한 鳳이 깃드는 곳이라 했으므로, 혹 모르겠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 했으므로, 주변에 그때는 오동나무 숲이 있었는지는 말이다. 

 

오랜 동안 절은 없어지고 그 터만 휑댕그레 남아있던 이곳은 그런대로 이름이 있었으니, 12세기 고려 중기 사회에서 꽤 이름을 높인 불교승려 현오玄悟라는 이를 기리는 탑비塔碑가 남은 까닭이라, 이 시대 고승 비문이 몇 개 남아있지 아니하니 그 희귀성에 힘입어 일찌감치 존재가 알려졌던 것이어니와, 그것이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까닭이었다. 

 

 

보다시피 광교산 기슭에 정확히 남향으로 서봉사는 위치한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절터 구역 중에서 중간 지점에 현오국사탑비가 자리하지만, 본래 위치는 아니다. 이 위성사진에서 보듯이 가파른 기슭 절터 중앙 동서쪽 지점으로 석축단이 확인되거니와, 크게 이를 기준으로 상단 구역과 하단 구역이 위치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번에 확인한 탑비 흔적 단서는 아랫단에서 확인된다. 

 

 

나는 이 서봉사 터를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부터 다닌 까닭에, 더구나 그 발굴조사 정비를 용인시가 추진하는 과정을 비교적 가까이 지켜본 관계로다가, 나아가 그 발굴조사 적마다 현장을 꼭 찾은 인연이 있어 그 내력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인연이 있다. 

 

이 서봉사 터는 2013년 이래 2017년에 걸쳐 4차례 발굴조사가 있었다. 모두 한백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를 맡았으니, 절터 전체 구역에 대한 확인이랄까 분포 범위는 대략 드러난 상황이다. 

 

 

중앙지점 절반을 가로 방향으로 툭 잘라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된다 보면 된다. 이번 조사지역은 노란색으로 표시됐다. 보다시피 하단이다. 

 

 

이를 토대로 2019년 이후에는 사역 정비를 추진커니와, 이 와중에 이번에 제5차 발굴조사가 있었다. 5차라 하니깐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 발굴조사는 하루인가 이틀짜리라, 기존 조사에서 석탑이 있던 자리다! 라고 추정한 곳을 정비에 앞서 한 번 제대로 파 보자 해서 건드렸으니 

 

조사는 3월 17~18일 꼴랑 이틀간 했으니 석탑 자리로 추정한 지점과 주변 47.85㎡를 살핀 것이다. 기존 조사에서 대략 다 파 보고는 덮어놓은 상태였으니, 잠깐 걷어내고 이참에 구조나 제대로 보자 해서 파제낀 것이다. 

 

 

노란지점이 이번 조사지점이다. 저 지짐에 석탑이 있던 곳이라 했으니, 그 뒤편을 당연히 금당이라 추정한 것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금당이 생각보다 작다. 또 하나 유의할 대목은 저 추정 석탑 마당을 중심으로 그 동서쪽에는 각각 익랑翼廊이라 일컫는 부속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익랑일까? 

 

 

 

이전 조사에서 확인한 이른바 석탑 추정지점. 마당 한가운데 방형 석축기단이 희미하게 드러남을 본다. 이걸 제대로 이번에 판 것이다. 동서쪽 지점 이른바 익랑 중에서도 동쪽 익랑은 바닥이 다 날아간 반면, 서쪽 익랑은 뚜렷이 흔적이 남았다. 이것이 문제다!!! 

 

 

한데 막상 파 보니 조금 골때리는 사정이 드러났다. 이번 조사 성과를 두고 용인시에서는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원위치 단서 확인 - 용인시, 5차 발굴조사서 중요한 근거 확보…추가 조사와 연구 진행할 계획 라는 제하 보도자료를 배포했거니와 

 

간단히 요점을 추리자면 기존 조사에서 석탑 자리로 추정한 곳은 석탑이 있던 자리가 아니라 다름 아닌 현오국사탑비가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요것이 이번에 드러난 추정 탑비 자리다. 

 

 

 

 

요로코롬 생겨먹었는데 이건 누가 봐도 무슨 기념물이 선 바닥 자리다. 문제는 이 석축 기단이 정방형이 아니라 장방형이라는 사실이다. 

 

동서 길이 2.9m에, 남북 폭 2.4m....바로 이 점이 석탑 자리임을 의심케 한 것이다. 

 

이 서봉사에 본래 석탑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현장에서는 석탑 부재가 널부러진 까닭이다.

 

 

이러코롬 생겼다. 보다시피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이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이 석축기단 아래로 기와를 깐 보도블록 같은 시설이 지난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이 기와 보도블록이 석축기단보다 먼저 생겼다. 그것을 파괴하고서 석축기단이 들어선 것이다. 

 

 

아무튼 석탑이 있었으므로, 어딘가에 그 탑이 있었을 것이어니와, 마침 저와 같은 방형 석축기단이 출현하니 이짝이 석탑 자리일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한데 문제가 돌발한 것이다. 석탑이라면 볼짝없이 정방형, 정사각형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출현한 석축기단은 2.9 곱하기 2.4 미터 장방형 직사각형이다! 

 

실은 이 대목에서 용인시와 발굴단 사이에 미묘한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조사단에서는 석탑 자리로 추정했거니와 그런 추정을 고수하고 싶어했고, 용인시에서는 해석이 좀 달랐다. 그 차이는 미묘함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내 판단은 무엇인가?

 

나는 이 자리를 발굴하고 공개할 시점에 현장을 찾았다. 이번 발굴지점과 주변 발굴정황을 점검하면서 내내 머리가 맴돌았다. 

 

"어??? 이거 조사당祖師堂인데???"

 

딱 이거였다. 그랬다. 이번에 발굴한 지점은 조사당 자리였다. 한국고고학 혹은 불교건축사 같은 데서 흔히 말하는 부도전 자리가 있는 곳이었다. 대개 이런 부도전 혹은 조사당은 해당 사찰의 창업 혹은 중건주인 고승의 부도탑과 그를 봉안한 부도전이 있고 그 양쪽에는 회랑이 분포하거니와, 이를 대표하는 곳이 바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자리다. 

 

딱 그랬다. 

 

이번에 드러난 추정 석탑 혹은 추정 현오국사탑비 자리가 중앙을 차지한 일대는 조사당이었다. 

 

내내 이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궁시렁궁시렁거렸다. 이거 조사당인데....

 

 

 

현오국사비 

 

 

한데 이곳을 조사당이라 확정하기에는 두 가지가 걸렸다. 

 

첫째, 그 위치다. 둘째, 그 구조다. 

 

조사당은 지금도 암자가 그렇거니와, 대개 사찰 후미진 뒤쪽 골짜기 같은 데 있다. 하지만 서봉사는 그 반대라 사찰 구역으로 들어서는 전면에 위치한다. 이 점이 걸렸다.

 

둘째 구조라는 측면에서 조사당은 부도탑과 탑비가 세트를 이루어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랑 탑비 하나만 있다. 이 점을 어찌 해명할 것인가?

 

 

이 현오국사비 기단을 받침하던 시설이 이번에 확인한 석축기단이다. 

 

 

나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이 현오국사 조사당은 서봉사라는 사찰이 들어서 운영되고 나서 한참이 지난 시점에 들어섰으니, 그 과정에서 이런 변칙이 행해진 것이다. 사찰 뒤쪽 광교산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다가 조사당을 만들어야 했지만, 현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곳에서 전면에다가 설치했다

 

둘째 탑비만 있고 부도탑이 없는 까닭은 비문 자체에서 해명한다. 현오국사는 개경에서 사망하고 그짝에서 다비식을 했다. 당연히 그의 부도탑은 개경에 있었다. 그 문하 제자들이 서봉사에다가 그에서 정통을 찾으면서 그의 행적을 기린 탑비만을 이곳에다 세우면서 부도탑 없이 탑비만 세운 것이다. 이런 일이 제법 있다. 부도탑은 다른 데 있지만 탑비는 여러 군데 세우는 일이 있었다. 

 

덧붙여 이곳을 고려시대 금당과 석탑 자리로 보기에는 아무리 현지사정을 고려한다 해도 규모가 너무 작다. 

 

요컨대 이번에 발굴한 석축기단은 현오국사 탑비 자리가 맞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구역은 그를 기리기 위한 조사당이다! 

 

이것이 내 잠정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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