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墓表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글을 써서 묻어 놓은 것이다.
중국 고고학자 황문필은 서북과학고사단 일원으로 1928년 봄과 1930년 봄 두 차례에 걸쳐 투루판 교하고성交河故城 인근 구서溝西·구북溝北·구남溝南의 무덤을 발굴했다. 구북에서 발견한 몇 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6~7세기 이 지역에 거주한 한인漢人 무덤이었다.
동同 시기 투루판 한인들(또는 중국어 사용자들)은 가문 단위로 무덤을 만들었다. 각기 돌로 낮은 담장을 쌓아 영역을 구분하고 이 안에 하나씩 무덤을 조성했다. 이 일족 공동묘지를 영塋이라 부른다.
황문필이 구서에서 발견한 17개 영瑩 중에서 조씨趙氏 가문 공동묘지인 조영趙塋에는 7개 무덤이 있다. 그중 두 번째 무덤에서는 묘표 석 장이 나왔다.
1. 가장 이른 시기 것은 부인 한씨韓氏 : 555년 67세로 사망. (488년생)
2. 두 번째는 부군夫君 조영종趙榮宗 : 573년 80세로 사망. (493년생)
3. 세 번째는 부인 마씨馬氏 : 604년 80대에 사망. (515~524년대생)
조영종은 한씨韓氏와 5살 적고, 셋째 부인 마씨와 22~31살 차이다. 부인 한씨가 사망했을 때 조영종은 62세, 마씨는 29~40세.
조영종이 마씨와 혼인한 시점과 마씨가 조영종 처가 된 때는 동일할까.
한 무덤에 잠든 세 사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건창 원년(555) 을해세 정월삭 임오 12일 계사. 진서부 시내간장 조영종 부인 한씨 춘추 67 숙환으로 사망. 조씨 처 묘표(建昌元年(555)乙亥歲, 正月朔壬午, 十二日水巳, 鎭西府侍內幹將 趙榮宗夫人韓氏 春秋六十有七寢疾卒, 趙氏妻墓表.)
연창 13년(573) 계사세 2월삭 정유 16일 임자. 무군부주부로 입사하여 내간장이 되고 다시 내행참군을 역임하고 교하 안상에서 병으로 사망. 춘추 80. 자 영종 조씨의 묘표.(延昌十三年(573)水巳歲, 二月朔丁酉, 十六日壬子. 今補撫軍府主簿, 復爲內幹將, 更遷爲內行參軍, 痗疾於交河堓上, 春秋八十, 字榮宗趙氏之墓表.)
연화 3년(604) 갑자세 9월삭 갑오 2일 을미. 진서부 □□참군 조영종 처 마씨, 춘추 8□세 조씨 (처) 묘표(延和三年(604)甲子歲, 九月朔甲午, 二日乙未. 鎭西府□□參軍 趙榮宗妻馬氏, 春秋八十有□, 趙氏之墓表.)
*** 이상은 국립박물관 이태희 선생 글이다. 아래는 台植補
앞에 "일족 공동묘지를 영塋"이라 한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이런 가족공동묘지를 대묘大墓라 한다. 영塋이나 大墓는 요컨대 묘역墓域이다.
황문필黄文弼(1893~1966)은 字를 중량仲良이라 하며, 호북성湖北省 한천현汉川县 사람이다.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 고고연구소考古研究所 연구원을 지낸 고고학자로 서북사학西北史地 학가学家다. 1918년 북경대학北京大学 철학계를 졸업했다. 북경대학과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사천대학四川大学, 서북대학西北大学, 북평연구원北平研究院, 중국과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이래 1930년까지 중서中瑞(중국-스웨덴) 서북고찰단西北考察团의 내몽골과 신장新疆 지역 연구에 종사했다.
1934년 이래 1937년까지는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学考察团 전임 연구원을 지냈다.
1935년 중앙고물보관위원회中央古物保管委员会 위원 자격으로 서안西安에 파견되어 주임으로 일했으며, 아울러 비림碑林 정리 작업 등에 종사했다.
1964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 전국위원회全国委员会 위원이 됐다.
4차에 걸쳐 신장新疆을 다니면서 이 지역 고고학 개척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투르판吐鲁番附 부근 고창고성高昌古城과 교하고성交河故城을 발굴했으며 아니호雅尔湖의 국씨麹氏 고창묘지高昌墓地를 발굴했고, 라포탁니罗布淖尔 북안에서 석기시대 유적을 찾는 한편 한대汉代 봉수烽燧 유적도 발굴했다. 탑리목塔里木 분지 주변지구에 대한 조사도 했다.
1957~58년에는 합밀哈密, 이리伊犁, 언기焉耆, 고차库车 및 아극로阿克苏, 객좌喀什, 파초巴楚, 화전和田 등지에 대한 조사도 했다.
누란楼兰, 구자龟兹, 우전于阗, 언기焉耆 등의 옛 터전과 많은 古城의 지리 위치와 역사변천을 연구했으며 국씨 고창의 기년과 영역을 연구했다. 고대 탑리목 분지 남북 쌍하两河의 변천 문제도 논변했다.
다음과 같은 저작이 있다.
《高昌陶集》(1934)
《高昌砖集》(1951增订)이건 다음 참조 dsr.nii.ac.jp/toyobunko/E-222.02-01-001/V-1/page-hr/0001.html.ja
《罗布淖尔考古记》(1948)
《吐鲁番考古记》(1954、1958)
《塔里木盆地考古记》(1958)
《新疆考古发掘报告》(1983)
《西北史地论丛》(1981)
《黄文弼蒙新考察日记(1927—1930)》,文物出版社
《西域史地考古论集》,商务印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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