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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낙랑군 위치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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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樂浪郡을 필두로 하는 이른바 한사군 위치 논쟁을 볼 때 그것이 평양 일대의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 혹은 요서에 있다고 보는 사람은 덮어놓고 재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 논쟁은 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렇다. 

 

평양에서 발굴된 논어죽간. 낙랑군 유물로 본다. 

 

1.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그 땅에 한 제국이 사군을 설치한 시기는 기원전 108년 무렵이다. 한데 지금의 평양 일대 낙랑이라는 곳에서 이후 100년 동안의 낙랑군이 있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은 없다. 이 점 심각하다. 


낙랑이라고 우리가 아는 유적은 모조리 기원전후 이후에 속한다.


이런 문제점에 봉착한 소위 정통 학계에서는 낙랑토성을 주목하는 듯하지만, 미안하나 낙랑토성은 그 초축 시점이 언제인지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유적 유물은 없다.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호구목판


2.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멸망한다. 이렇게 멸망한 낙랑이 느닷없이 얼마 뒤에 곧바로 출현하는데, 그것이 출현하는 장소가 요서다. 한데 이렇게 재탄생한 낙랑군 속현을 보면 멸망하기 이전 속현들이 거의 그대로 등장한다.

 

이를 교군僑郡이라 설명한다. 교군이란 무엇인가? 해외 사는 우리 동포를 교포라 부르듯이 이 시대에는 적에게 함락된 저쪽 땅을 이쪽 땅에다가 고스란히 이사를 하듯이 새로 설치했다고 하는 논리다.

 

한데 낙랑군을 교치했다고 하지만, 낙랑군을 교치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낙랑을 교치했다는 기록은 그 후대의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다. (補 : 낙랑군이 미천왕 때 멸망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가 침략했다는 기록만 있다.) 

 

 

이른바 낙랑 금제교구(왼)와 낙랑예관樂浪禮官 새김 와당

 

3. 낙랑군 요서설을 주장하는 일각의 무리가 내세우는 고고학적 근거는 진황도와 수중현 일대 진 혹은 전한시대 소위 진시황 한무제 행궁 유적들인데, 이 행궁들은 신통방통하게도 그 등장시기가 위만조선이 들어선 기원전 200년 무렵이며 그것이 폐기된 시기는 더욱 신통방통하게도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0년 무렵이다.

 

이들 시황제 행궁 유적은 중국학계에서 그리 주장하는 것이지만, 니들이 제아무리 사기 한서 다 뒤져봐라. 지금의 진황도 수중현 일대에 행궁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갈석궁이라는 기록 하나만 달랑 나오는데, 그것도 전후 맥락 따져보면 말이 안되는 소리다. 

 

낙랑 왕우묘 출토 가죽신발

 

4. 위만조선은 존속시기가 대략 기원전 200~기원전 100년의 100년이다. 위만조선시대를 증언하는 유적 유물이 단 한 점도 없다. 이 점 존속기간이 짧아서 그렇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들어섰고 같은 시기에 망한 남월 왕국을 보라...광동성 일대 광주 가서 보라. 왕궁에 왕릉에 수갑 유적에 고분 유적에 남월왕국시대 유적 유물이 드글드글하다.

 

이 네 가지 의문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결코 낙랑군 위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원후 수백년간 소위 낙랑군이 평양 일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2015. 12. 29)

 

***

 

영종도 출토 이른바 낙랑계 토기

 

이 놈의 낙랑군 위치 논쟁은 한국정치판 해묵은 적폐인 진영논리가 작동해, 그 위치를 지금의 평양 일대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중국 동북지방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재야사학이니 유사역사학이니, 식민사학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 상대를 공격하곤 한다. 

 

문제는 나름 그것을 어찌 설득력 있게 전개하느냐이지 어찌 결론만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리오?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정통강단사학계에서도 앞에서 제시한 저 네 가지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같은 공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중국 바이두사전 낙랑군 항목에 첨부한 낙랑군. 이건 정도가 아주 심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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