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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교하교성交河故城 인근에서 찾은 조씨趙氏 묘표墓表 석 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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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墓表는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글을 써서 묻어 놓은 것이다.

 

중국 고고학자 황문필은 서북과학고사단 일원으로 1928년 봄과 1930년 봄 두 차례에 걸쳐 투루판 교하고성交河故城 인근 구서溝西·구북溝北·구남溝南의 무덤을 발굴했다. 구북에서 발견한 몇 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6~7세기 이 지역에 거주한 한인漢人 무덤이었다.

 

황문필黄文弼(1893~1966)

 

동同 시기 투루판 한인들(또는 중국어 사용자들)은 가문 단위로 무덤을 만들었다. 각기 돌로 낮은 담장을 쌓아 영역을 구분하고 이 안에 하나씩 무덤을 조성했다. 이 일족 공동묘지를 영塋이라 부른다.

 

황문필이 구서에서 발견한 17개 영瑩 중에서 조씨趙氏 가문 공동묘지인 조영趙塋에는 7개 무덤이 있다. 그중 두 번째 무덤에서는 묘표 석 장이 나왔다.


1. 가장 이른 시기 것은 부인 한씨韓氏 : 555년 67세로 사망. (488년생)
2. 두 번째는 부군夫君 조영종趙榮宗 : 573년 80세로 사망. (493년생)
3. 세 번째는 부인 마씨馬氏 : 604년 80대에 사망. (515~524년대생)

 

 

교하고성


조영종은 한씨韓氏와 5살 적고, 셋째 부인 마씨와 22~31살 차이다. 부인 한씨가 사망했을 때 조영종은 62세, 마씨는 29~40세.

 

조영종이 마씨와 혼인한 시점과 마씨가 조영종 처가 된 때는 동일할까.

 

한 무덤에 잠든 세 사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趙榮宗夫人韓氏 墓表


원문은 다음과 같다. 


건창 원년(555) 을해세 정월삭 임오 12일 계사. 진서부 시내간장 조영종 부인 한씨 춘추 67 숙환으로 사망. 조씨 처 묘표(建昌元年(555)乙亥歲, 正月朔壬午, 十二日水巳, 鎭西府侍內幹將 趙榮宗夫人韓氏 春秋六十有七寢疾卒, 趙氏妻墓表.)

 

연창 13년(573) 계사세 2월삭 정유 16일 임자. 무군부주부로 입사하여 내간장이 되고 다시 내행참군을 역임하고 교하 안상에서 병으로 사망. 춘추 80. 자 영종 조씨의 묘표.(延昌十三年(573)水巳歲, 二月朔丁酉, 十六日壬子. 今補撫軍府主簿, 復爲內幹將, 更遷爲內行參軍, 痗疾於交河堓上, 春秋八十, 字榮宗趙氏之墓表.)

 

연화 3년(604) 갑자세 9월삭 갑오 2일 을미. 진서부 □□참군 조영종 처 마씨, 춘추 8□세 조씨 (처) 묘표(延和三年(604)甲子歲, 九月朔甲午, 二日乙未. 鎭西府□□參軍 趙榮宗妻馬氏, 春秋八十有□, 趙氏之墓表.)

 

 

교하고성

 

*** 이상은 국립박물관 이태희 선생 글이다. 아래는 台植補

 

앞에 "일족 공동묘지를 영塋"이라 한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이런 가족공동묘지를 대묘大墓라 한다. 영塋이나 大墓는 요컨대 묘역墓域이다. 

 

황문필黄文弼(1893~1966)은 字를 중량仲良이라 하며, 호북성湖北省 한천현汉川县 사람이다. 중국과학원中国科学院 고고연구소考古研究所 연구원을 지낸 고고학자로 서북사학西北史地 학가学家다. 1918년 북경대학北京大学 철학계를 졸업했다. 북경대학과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사천대학四川大学, 서북대학西北大学, 북평연구원北平研究院, 중국과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이래 1930년까지 중서中瑞(중국-스웨덴) 서북고찰단西北考察团의 내몽골과 신장新疆 지역 연구에 종사했다.

 

1934년 이래 1937년까지는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学考察团 전임 연구원을 지냈다.

 

1935년 중앙고물보관위원회中央古物保管委员会 위원 자격으로 서안西安에 파견되어 주임으로 일했으며, 아울러 비림碑林 정리 작업 등에 종사했다.

 

황문필 編 《고창高昌》

 

1964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 전국위원회全国委员会 위원이 됐다. 

 
4차에 걸쳐 신장新疆을 다니면서 이 지역 고고학 개척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투르판吐鲁番附 부근 고창고성高昌古城과 교하고성交河故城을 발굴했으며 아니호雅尔湖의 국씨麹氏 고창묘지高昌墓地를 발굴했고, 라포탁니罗布淖尔 북안에서 석기시대 유적을 찾는 한편 한대汉代 봉수烽燧 유적도 발굴했다. 탑리목塔里木 분지 주변지구에 대한 조사도 했다.  

1957~58년에는 합밀哈密, 이리伊犁, 언기焉耆, 고차库车 및 아극로阿克苏, 객좌喀什, 파초巴楚, 화전和田 등지에 대한 조사도 했다.  

누란楼兰, 구자龟兹, 우전于阗, 언기焉耆 등의 옛 터전과 많은 古城의 지리 위치와 역사변천을 연구했으며 국씨 고창의 기년과 영역을 연구했다. 고대 탑리목 분지 남북 쌍하两河의 변천 문제도 논변했다.  

다음과 같은 저작이 있다.  
《高昌陶集》(1934)
《高昌砖集》(1951增订)이건 다음 참조 dsr.nii.ac.jp/toyobunko/E-222.02-01-001/V-1/page-hr/0001.html.ja
《罗布淖尔考古记》(1948)
《吐鲁番考古记》(1954、1958)
《塔里木盆地考古记》(1958)
《新疆考古发掘报告》(1983)
《西北史地论丛》(1981)
《黄文弼蒙新考察日记(1927—1930)》,文物出版社
《西域史地考古论集》,商务印书馆

 

高昌磚集 : vol.1 / 1 ページ(白黒高解像度画像)

国立情報学研究所 - ディジタル・シルクロード・プロジェクト 『東洋文庫所蔵』貴重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dsr.nii.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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