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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군정기 국대안 파동과 한국현대사

by 초야잠필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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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서술에서 문제가 있는 대표적 예가 국대안 파동이다. 

이 국대안 파동은 현재 서술된 내용만 보면 

멀쩡하게 있는 대학을 대학교수들 의견 무시하고 강제로 통합하려다 싸움난 것을 

군정이 한국인 의사 무시하고 밀어붙여 경성대 (서울대)가 남북으로 쪼개진 사건 정도로 써 놨는데, 

필자가 파악하는 국대안파동 전말은 이렇다. 

1. 당시 국립서울대를 만들기 위해 통폐합하는 해방한국의 소위 대학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 급조하여 대학승격이 기획된 것으로 죄다 함량 미달이었다.

특히 해방이전 대학은 제대 하나뿐인데다가 전부 고등농업, 고등공업 등 전문학교였던 탓에 통폐합 없이는 힘든 상황이었다 할  수 있다. 

2. 당시 국대안을 반대하던 교수나 학생들은 원래 그 학교 학생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해방이후 급조되어 들어온 사람들로 학생이야 그렇다 쳐도 교수들이 더 문제였다.

이 분들은 해방 이전 교수를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아니었고 명색이 서울법대도 교수가 죄다 학사출신에 박사는 딱 둘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국대안 와중에 경성대학장을 관두게 된 백낙준이었다.

백낙준 빼고 나면 서울법대 안에 박사학위 소지자가 딱 하나였다.

그리고 서울대 교수 전체 교수들 중 해방 이전에 원래 경성제대 교수 하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국대안이 나왔을 때 이 사람들은 당시 적산대학이나 다름없는 경성대 교수 한 지가 딱 1년 된 분들로 해방 이전에 거취는 학문을 논할 처지가 아닌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해방이전 조선인의 전반적 교육수준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 탓에 조선인 교육 수준은 심각히 낮은 상태였고

이는 고등교육일수록 더 심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 입장에서는 대학도 대학이지만 교원 수준도 의문이라 통폐합 대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3. 원칙적으로 군정의 종합대 안은 맞는 방향이다.

수준 미달의 대학과 교원, 학생을 묶어 미국식 종합대를 만들자는 데 그게 왜 반대할 거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 국대안 반대 명분을 보면 하나도 설득력이 없다.

반면 해방 이후 한국 교육은 국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거의 국대안과 동일한 종합대로 발전했고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도 GHQ시절에 한국과 같은 교육제도의 변혁을 겪었는데 이때 미국식 종합대학제도를 수용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4. 국대안 파동이 커진 이유는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이 통합시 경성의전을 차별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당시 경성대는 경성의전과 통합하면서도 의전은 전문부로 전환하여 학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이것은 군정 측 책임으로 돌리지만 이는 군정 측 방침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마 미군정 입장에서는 경성제대 의학부나 의전이나 어차피 거기가 거긴데 합쳐서 학사 주고 끝내자 싶었을 것이라 본다.

개인적으로는 경성의전에 대한 차별안은 미군정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당시 조선의 의사 교육제도를 잘 알던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왜냐하면 해방 전 조선의 의사 교육제도는 미국과 완전히 달라, 
이 아이디어가 군정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전문학교 출신을 전문부로 편성하여 졸업 때 따로 관리하는 방식은 해방 전 일본 대학에서 하던 처리 방법이다. 

어차피 미군정은 새로 판을 짜는 판이라 의전이고 제대 의학부고 나발이고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고,

군정은 실제로 전쟁전 조선의 전문학교를 전부 대학승격시켰기 때문이다. 

국대안 파동은 현재 그 해석에 있어 왜곡된 부분이 많다. 

다시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P.S.) 미군정기에 경성대 총장을 미군 대위를 시켜 놓은 것은 좀 고려할 부분이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당시 서울대 (경성대) 교수들보다 그 미군대위 학벌이 더 좋았을 수도 있었겠다고 본다. 

당시 서울대 교수 태반이 학사로 박사 소지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미군대위 학벌을 보지 못해 확신하여 뭐라고는 할 수 없는데
 
당시 미군에는 전쟁통에 들어온 꽤 학벌 좋고 경력 번듯한 사람이 군문에 많았다. 

물론 이들도 곧 예편하게 되지만.. 

그나마 박사출신 교수가 좀 있던 데가 해방 이전에도 논문박사 제도로 학위취득자가 좀 있던 의대이고 

나머지 단과대학은 박사가 어딨나.

정규 학사도 구하기 어려운 판에.. 

당시 해방 조선의 전반적 교육수준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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