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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머물던 곳

by taeshik.kim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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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송혁기 교수님 최근 포스팅을 보고, 다녀온지 오래된 그곳을 한 번 다시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방학동 간송 전형필(1906~1962) 옛집과 산소 앞길로 쭉 걸어올라간다.

왼쪽에 택시회사 건물을 두고 한 2분? 걸어가다 왼쪽 골짜기를 보면 작은 바위 사이로 제법 깊은 계곡을 만난다. 거기 바위에 '귀록계산歸鹿溪山'과 '와운폭臥雲瀑'이란 각자가 있다.


歸鹿溪山
臥雲瀑



요 며칠 크게 낮아졌던 기온에 계곡은 꽝꽝 얼어붙었지만, 그 아래엔 귀록 선생이 들었을 물소리가 아직 나고 있었다.

바위에 새긴 글씨 수준도 상당한데, 18세기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듯싶다. 지금은 주춧돌은 고사하고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지만, 군데군데 다듬은 흔적 역력한 돌멩이들이 보인다.


臥雲瀑
臥雲瀑



한때 세도 당당했던 정승의 별서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귀록'이란 조현명의 호처럼 사슴이나 고라니가 여기 노닐었을지도 모른다.


歸鹿溪山



아직도 이쪽 산의 상당수는 풍양 조문의 소유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조현명의 시대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하며 이 산에 오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 

 

조현명에 대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설명은 아래와 같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집필 (1998년) 정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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