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고인돌묘 허가없이 정비업체 맘대로, 혹은 자문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탈법으로 정비 진행했다 해서 난리친 곳이라.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라도 제대로 파제껴야 한다 해서 개판 난 그곳을 정식 발굴업체 섭외해서 발굴을 맡겼더니만
예상대로 저 고인돌묘 만들기 이전에 사람들이 일군 흔적이 드러났다 하는데
이리 된 마당에 언론을 통해 대국민 보고는 안 할 수는 없어 그 성과를 공개했거니와
보니 조사는 삼강문화재연구원이 맡았으니 문제의 정비를 부른 이곳 발굴단이라 그 수장은 최종규라, 조사 지점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079번지 일원이라
암튼 저들에 의하면 저 고인돌 묘역 박석이 깔린 밑에서 청동기 취락 흔적을 확인했다는데 취락이 뭐냐? 부락과 같은 말로 마을이다.
마을 혹은 집터라 하면 되지 무슨 얼어죽을 취락이란 말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고인돌 덮개 중에선 추정 무게가 물경 350톤에 이르는 국내 최대 세계 최대라는 저 고인돌묘가 들어선 시점은 내 기억에 기원전 1세기 무렵으로 추정하니 당연히 그 밑에서 나온 것이야 그보다 빠른 시대 흔적 아니겠는가?
그 결과 청동기시대 사람들 산 흔적이 확인되었다는데, 이번 조사구역 내에서 이미 2007년 확인한 송국리형 집터 2동을 비롯해 총 3개 동 집터와 불 먹은 흔적 2곳, 정확한 기능을 알기 힘든 구덩이 7곳 외에 나무기둥 구멍 흔적 등 공동생활을 영위한 집단이 남긴 흔적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번 성과를 조사단이 평하기를 "구산동 지석묘의 축조시점이 초기철기시대로 알려져 있음에 따라 이번에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라고 했지만 글쎄 그럴까?
송국리형 집터랑 고인돌묘는 너무 시간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송국리형 주거지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드러남으로써 유명해졌다는 뜻에서 그와 비슷한 게 나왔다 하면 송국리형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암것도 아니라 그냥 둥그레한 집 혹은 방 한가운데다가 구덩이 하나를 파고 그 양쪽에다가 2개 나무기둥을 박은 모양을 한다.
국립박물관이 지들이 팠다 해서 이런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대개 기원전 8세기 무렵을 상한으로 삼는다고 안다. 요샌 좀 올라갔나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송국리형 집터랑 고인돌묘는 무려 그 시간격차가 많으면 800년, 늦잡아도 500년은 난다. 그런 마당에 무슨 이행과정을 보여준단 말인가? 둘은 관계 없다.
이번 발굴 성과는 그냥 고인돌묘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에 사람이 산 흔적이 나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끄러운 현장이라 해서 애써 의미를 과대 포장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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