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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근대의 선물 문화재, 그 프로토 타입이 우리한테는 없었을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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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쯤이었다. 지인 한 분이 느닷없이 문화재보호법 등장 이전, 혹은 근대적 의미에서 문화재라는 개념이 수입되고 법으로 정착되기 이전, 그러니깐 구체로는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이전, 더 구체로 보면 조선시대 이전 프로토 proto - 문화재 라 할 만한 실체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 본 적도 없기에 그 자리서 마뜩한 대답이 생각나지 아니했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한 말이라고는
 
글쎄, 근대기 이래 여러 과정을 거쳐 나중에 문화재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리기 이전에 흔히 그 부류 중 하나로 이전부터 사용한 대표적인 말이 주로 고찰古刹을 의미하는 불우佛宇라든가 명승名勝 혹은 경승景勝 같은 말이 있어, 그것이 굳이 찾는다면 프로토 문화재 아닌가 한다 
 
하는 정도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초상은 대표적인 프로토 문화재였다. 목은 이색 초상

 
그런 대화가 그 지인은 심각했을지 모르나, 나는 심각한 것은 아니었기에 묻어두고 말았다. 그러다가 신기하게 가끔씩 주기발작으로 저 물음이 계속 나를 맴돌았으니, 글쎄 저 프로토 문화재라는 개념이 우리한테 있기는 했을까? 

이에서 나는 문화재라는 개념을 지팅케 하는 절대의 조건으로 protection and management를 상정했으니, 그것이 근대적 의미에서의 문화재는 아니거나, 혹은 그에 부족하다 해도, 저 보존관리가 들어간 개념들이 무엇이 있을까를 어느 순간 이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다가 가장 먼저 만난 존재가 개성 선죽교였다. 아다시피 이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조영무던가?)한테 철퇴를 맞고 죽어가며 흘린 핏자국이 남아있다는 그 석교다. 

조선시대 후기 어떤 문집을 읽는데, 무심코 그 문집이 채록한 어느 시구에서 관아에서인지, 누구 소행인지는 분명치 아니하나, 이미 당시에 그것을 보호하고자 금줄을 쳐 놨다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것이 프로토 문화재 한 보기일 줄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가 풀리는 듯하니, 예전에는 미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주마등처럼 하나둘 스쳐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산서원을 간 일을 떠올렸다.

그 도산서원 한 구석은 퇴계 손때가 묻은 유물을 모아놨는데, 그것이 실제 퇴계가 사용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퇴계 사후 그렇게 보관한 물건들이 퇴계의 숨결이 묻은 것이라 해서 애지중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퇴계야 워낙한 유학의 종장이요, 무엇보다 사색당파 중에서도 그 절반을 차지하는 남인의 오야붕이라, 당쟁이 격화할수록 조선 후기에 이상한 현상이 빚어지는데, 그를 남상으로 삼는 유학 종파 사람들한테는 도산서원을 방문하는 일이 그 종문 소속임을 확인하는 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이었다. 

성호 이익이 대표적인데, 그는 일부러 퇴계의 숨결을 느끼겠다며, 그의 흔적이 남을 만한 곳은 부러 찾아 영주며 안동 일대를 도는데, 그 종착점이 도산서원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그에서 퇴계 유물을 접하고는 감격에 계워 마지 않는 모습을 대하고는 아 이거다 했더랬다. 이것이 프로토 문화재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빌미로 하나씩 윤곽이 잡혀갔다. 저 프로토 문화재를 대표하는 증좌가 바로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서양의 그것과는 왕청나게 동아시아 문화권 기능은 달라 신주 그 자체였다.

그런 까닭에 초상은 언제나 소중히 다뤘으며 집에 화재가 나면 가장 먼저 구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초상이었다. 이 초상은 그런 까닭에 훼손이 가속화하면, 모사 혹은 임모라 해서 카피본을 떴다. 

그렇게 해서 목은 이색이나 이제현 초상은 이 모사 임모를 거쳐 오늘에 이르니 그 역사만 해도 물경 600-700년에 달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놓친 것이 가보家寶라는 이름으로 통용하는 무수한 것들이었다. 이 가보가 가문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가장 흔한 것이 교지敎旨라 해서 관직 임명장이었다. 이 교지는 그런 까닭에 후대에 와서는 위조가 가장 많이 이뤄진 존재이기도 하다.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그 욕망을 읽어내야 한다. 이 욕망은 실은 문화재 개념으로 보면 문화재 그 자체였다. 

유명한 사찰이나 정자는 간단없는 훼멸과 재생의 반복을 거듭했다. 그 힘이 무엇일까?

전국에서 이름이 남은 정자 혹은 누정이라는 누정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고려시대 이전으로 닿는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는 그 건축물은 대부분이 조선후기를 넘지 못한다. 조선전기로 올라가는 건축물도 전국을 통털어 몇 되지 않는다. 

무엇이 그것을 현재에 이르게 했을까? 나는 그 재생 욕구를 프로텍션 앤 매니지먼트 개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재는 근대의 산물임이 분명하나, 그렇다 해도 그것이 전연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다시 물어본다면, 이제는 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나한테 그런 질문을 던진 이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 

그렇게 묻던 사람들은 신통방통하게도 다 떠나더라.

나는 이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하고 뒤를 돌아보면 그걸 물은 사람은 가고 없더라. 

 

양계초 청대학술개론



아, 이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남의 물음에 대한 궁금증을 파는 일이 때로는 내 일이 되기도 하더라는 보기로 꺼낸 이야기다. 

저 꼴로 아예 서문 써주다가 나도 그걸로 책 내겠다 해서 서문이 단행본으로 발전해 대히트한 상품이 양계초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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