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289)
홍매(紅梅)
[元] 왕면(王冕, 1287? 1310? ~ 1359) / 청청재 김영문 選譯評
깊은 정원 봄빛이
끝이 없는데
향풍 불어 초록 물결
일어나누나
옥 같은 매화는
고운 꿈 깨어
꽃비로 붉은 연지
떨어뜨리네
深院春無限, 香風吹綠漪. 玉妃淸夢醒, 花雨落胭脂.
왕면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시인 겸 화가다. 특히 그는 매화를 좋아하여 평생토록 매화를 심고[種梅], 매화를 읊고[詠梅], 매화를 그렸다[畵梅]. 그의 호 매화옥주(梅花屋主)도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가 그린 매화 그림이 여러 점 전한다. 「묵매도(墨梅圖)」, 「향설단교도(香雪斷橋圖)」, 「남지춘조도(南枝春早圖)」 등은 모두 먹의 농담(濃淡)으로만 매화를 그린 명작이다. 이 중 「향설단교도」에 이 시의 묘사와 같은 매화 꽃비를 그렸다. 그런데 그것을 꽃비(花雨)로 표현하지 않고 향설(香雪) 즉 향기로운 눈이라 했다. 아름다운 비유다. 화제(畫題)는 자신의 시가 아니라 융욱(戎昱) 또는 장위(張謂)의 명편 「이른 매화[早梅]」를 썼다.
꽃비라는 표현은 여러 문학예술에 등장하고 심지어 유행가 가사에까지 보인다. 하지만 나는 에밀레종의 꽃비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화이며 명시라고 믿는다. 언젠가 경주국립박물관에 갔다가 마당에 전시된 에밀레종 앞에 선 적이 있다. 나는 소리도 없는 그 유명한 대종을 찬찬이 살펴보다가 한 순간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놀랍게도 에밀레종의 당좌는 연꽃이었다.(나중에야 알았지만 거의 모든 범종의 당좌는 연꽃이다.) 그것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이 하나 된 깨달음의 형상이었다.
당목을 당겨 당좌를 치는 순간 당좌의 연꽃은 은은하고 묵중한 종소리로 화(化)하여 온 천지에 퍼져간다. 아니 반대다. 종소리가 연꽃으로 화(化)하여 천지사방에 꽃비로 뿌려진다.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구름을 탄 비천상의 선녀가 강림한다. 하늘과 땅은 꽃비로 가득하다. 장엄한 종소리로 가득하다. 연꽃 향기로 가득하다. 법화(法華)와 화엄(華嚴)의 세계다. 부처님의 말씀이 꽃비가 되어 내리는 세계 그것은 다름 아닌 극락정토다. 극락정토는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통도사, 화엄사, 백양사, 선암사 등 절집의 흐드러진 매화도 부처님 말씀 즉 법화(法華)의 현현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화엄세계를 지향한다. 이제 곧 법화의 꽃비가 분분히 쏟아질 때다. 이 때 깨닫지 않고 언제 깨달을 것인가?
王冕作 흑매도黑梅圖. 상해박물관(上海博物館) 소장. from wikipedia
***台植補
王冕은 중국 원대元代 말기 화가이자 시인이며 전각가篆刻家다. 字는 원장元章이라 했으며, 號는 저석산농煮石山農, 회계외사(會稽外史), 매화옥주梅花屋主 등을 썼다. 지금의 절강성인 諸曁 출신이다.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는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각지를 떠돌며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하게 과거에 낙방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낸 청나라 소설가 오경재吳敬梓의 정치풍자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에도 등장한다.
그림에서는 화조화花鳥畵에 일가를 이뤘으니, 특히 매화 그림을 좋아했다. 매화는 망개한 모습을 잘 표현했다.
시인으로서는 당시 정치 세태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아가 우연히 화유석花乳石이라는 돌을 넣게 되어 이 일로 전각에도 손을 댔다.
만년에는 회계會稽의 구리산九里山 기슭에다가 매화암梅花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은거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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