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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낙양 북망산에서 출현한 위진魏晋시대 고위 관료 가족 공동묘지

by taeshik.kim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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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aokan.baidu.com/v?pd=wisenatural&vid=8905354517960629528

 

 

아래 설명을 대비하면 가운데가 M1이다. 왼쪽이 M2, 오른쪽이 M3 같다.

 
낙양洛阳 맹진구孟津区 송장촌送庄村 동남쪽 지구에서 3개 묘장墓葬을 남북 방향으로 안치하고서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차례로 만든 위진시대 가족 공동묘지가 발굴됐다고 낙양시고고연구원洛阳市考古研究院이 최근 발표했다. 

이들 무덤은 모두 시신을 묻는 공간인 묘실墓室은 북쪽에 두고 그 반대편 남쪽에다가 묘실 안쪽으로 통하는 출입구인 묘도墓道를 설치했다.

이번 발굴 책임자인 연구원 부연구원副研究员 유빈刘斌에 의하면 낙양에서 발견된 위진시대 묘장은 매우 드문 상황에서 고위 관료를 역임한 가족 공동묘지가 처음으로 낙양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조사단은 이들 무덤에 대해 각각 M1、M2、M3라는 구별 명칭을 부여했다. 중국 고고학에서 흔히 약어로 등장하는 M이란 mound 곧 무덤을 지칭한다.

M1은 묘도墓道、전봉문砖封门、용도甬道、석문石门、방형 주실方形主室、동측실东侧室로 구성되며, 묘도墓道 양쪽에는 각각 12개 주갱柱坑, 곧 기둥구멍이 있다. 12개라는 숫자는 언뜻 12지를 떠올린다. 묘도에서는 7개 대계[台阶, 臺階]가 확인됐다 하는데 턱이 아닌가 한다.

묘장은 전체 길이39.8미터다. 깊이는 11미터에 이르며 주실主室 뒤쪽 정중앙에는 칠관조漆棺罩 하나를 놓았다 하는데, 옻칠을 한 목관이라는 의미 같다. 

장사파묘도长斜坡墓道, 곧 묘도를 길게, 그리고 아래로 계단을 지어 내려가며 만든 양상이라든가 그것을 좁혀가는 모습으로 만든 형태는 위진시대 묘장 특징이라고 한다.

유빈에 의하면 7개 계단과 12개 기둥 구멍을 갖춘 M1은 현재까지 발견된 서진시대 무덤 중에서는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것이며, 이를 뛰어넘는 데는 왕실 무덤밖에 없다고. 
 

출토품 중 묘주인 생전 애용물이라 해서 소개한 것이다.


M1과 비교할 때 M2와 M3는 결구 방식이 상대적으로 간소하다. 하지만 묘도墓道와 전봉문砖封门, 용도甬道, 그리고 방형 묘실墓室을 갖춘 점은 같다.

M2 묘도 안에서는 3급 대계를 확인했다. 전체 길이 28.7미터, 깊이 10미터에 이른다.

M3 묘도에서는 6급 대계가 확인됐다. 전체 길이 32.4미터에 깊이는 10.5미터에 이른다. 

이들 3개 묘장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도기陶器、청자기青瓷器、동기铜器、철기铁器、칠기漆器、골기骨器、옥기玉器、금기金器、전폐钱币 등 200여 건에 이르며 처음 보는 유물이 많다고. 
 

출토품 중 의미를 부여한 유물이다.



예컨대 M1 출토 상아편칠기象牙编漆器가 그렇다. 유빈에 의하면 칠기漆器와 상아는 모두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며 따라서 묘 주인은 단순한 “대호인가大户人家”를 뛰어넘는다고.

기타 M1에서는 봉황 무늬를 새긴 뼈 귀걸이인 봉조문 골이당凤鸟纹骨耳珰 한 쌍이 출토됐다. 이 이당耳珰은 현대 사회의 耳坠와 耳钉에 해당하며 일찍이 원시사회에서는 여성들 장식품이었다가 한대汉代에 이르러 다시금 유행하게 됐다고 한다. 

M1 출토 120여 건에 달하는 기물 중에는 제작이 정미한 동포금패식铜包金牌饰과 금오주金“五朱” 등과 같은 장식품이 있고, 이 외에도 색택보윤色泽莹润한 옥대구玉带钩랑 옥검체玉剑璏(검초剑鞘 위에 고정하고 공천계供穿系 혁대 기물) 등과 같은 옥기도 있다.

하지만 옥대구玉带钩랑 옥검체玉剑璏는 양식으로 볼 적에 당시 기물이 아니라 전국시대 물건이라 아마도 묘주인 집안에서 내려온 전가보“传家宝”로 판단된다. 

이들 출토유물로 볼 때 M1은 서진시대 중만기에 만들었다고. 
 



M2 출토 전폐钱币에는 조위曹魏시대 오수전五铢錢과 한汉나라 시대 반량半两이 있어 그 조성 연대는 조위曹魏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M3 출토품에는 사계권四系罐과 삼차형기三叉形器 등 전형적인 서진시대 기물이 있고, 기타 묘실 탑락塌落한 전토填土 중에서는 잔비残碑가 나왔으니 그에는 “양준작역칭병杨骏作逆称兵”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양준杨骏이 권력을 농단하다 주살당한 때가 서기 291년이라 묘장 연대는 당연히 이 사건 이후일 터이니 서진 중만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들 무덤 세곳에서는 모두 조위와 서진시대 무덤에서는 흔히 보이는 도용陶俑이라든가 명기明器가 없고 대신 일용기日用器나 제전기祭奠器, 그리고 묘주인이 평소 패용한 기물이 다수라 묘주인이 고위 관료였음을 엿보인다.

따라서 이번 발견으로 당시 저런 상위층 사회의 매장 문화 패턴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두 쪽짜리 잔비残碑는 비록 흙더미 속에서 발견됐지만 본래는 지면 위에 세웠던 것으로 판단되며 남은 문자로 보아 묘주인 인명과 생몰은 없지만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문생고사门生故吏, 적관군망籍贯郡望 등에 관한 내용이 보여 향후 분석 결과에 따라 중요한 내용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기존 고고학 발굴성과 그리고 이번 발굴성과를 종합할 때 무덤이 출현한 이 일대는 조위 서진시대 수양산首阳山 제릉帝陵 배장묘 지구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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