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직(后稷)을 시조로 삼은 주(周) 왕조 창업을 노래한 《시詩·대아大雅》 〈생민生民〉과 〈비궁閟宮〉은 주인공이 주 왕조를 개창한 시조 후직이 아니라 그 엄마 강원姜嫄이다. 이 점을 후대 모든 사가(史家)는 혼동했다. 후직을 노래한 것으로 착각, 혹은 무게 중심을 후직으로 보았으니, 이는 패착이다.
내가 늘 지적하듯이, 위대한 시조의 탄생담(이를 우리는 흔히 건국시조, 혹은 시조신화라 한다)에는 늘 같은 구도가 있어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없애 버린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그 자리에 하늘[天]을 늘 갖다 놓는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왕조를 창업한 시조는 천자(天子), 곧 하늘의 아들[天之子]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예수다. 예수한테도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어, 그 자리에다가 야훼를 갖다 놓는다. 그 야훼가 곧바로 동정녀 마리아와 감응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예수라는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주 왕조 건국시조는 후직后稷이다. 그가 창업하는 과정을 앞서 말한 《시경詩經》 〈生民〉은 이렇게 노래한다.
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 以弗無子. 履帝武敏, 歆, 攸介攸止. 載震載夙, 載生載育, 時維后稷.
이는 종묘제사 따위에서 부르는 용비어천가 같은 노래다. 이 자리에서 그 운율까지 살려 내가 번역할 재간이나 시간 여유가 없으니 대략 의미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 왕조 초창기에 우리 주나라 사람을 낳은 이 강원이시라. 우리 주나라 사람을 어떻게 해서 낳았던고? (강원께서) 야외로 나아가 불을 피워 하늘에 제사하시면서 아들을 낳아주길 기도했노라. 그때 강원께서 하느님 엄지발가락 자국을 우연히 밟으시고는 오르가즘에 이르셨다. 그 오르가즘에 취하시어 잠시 머무시면서 몸을 부르러 떨다가 이내 임신을 하시고 아들을 낳아 기르니, 이 분이 바로 우리 시조 후직이시라.
하느님[帝]이 이 땅위을 걸으시며 남기신 발자국[武] 가운데서도 유독 강원은 그 엄지발가락[敏] 자국에 발을 디뎠다가 오르가즘[歆]을 느끼고, 이 일로 임신을 하게 된다. 내가 보건대 엄지발가락은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다. 그것을 밟고는 "歆(흠)"했다 하거니와 이 말은 오르가즘에 몸을 떨었다는 뜻이다.
보라, 天子라는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우리는 이에서도 목도한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강원은 건국 시조 후직을 낳았으니 그 어머니 강원은 얼마나 추숭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하여 주 왕조에는 시조 후직을 제사하는 시조묘, 그리고 후직 이래 역대 제왕을 제사하는 종묘 외에도 그 뿌리인 건국시조의 어머니 강원을 제사하는 별도의 국가 제사시설을 건립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비궁閟宮이다.
비궁은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근간을 관통하는 거대한 비밀 중의 하나다. 고구려에도 주몽 어미 유화(柳花)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고, 백제에도 온조 어미인 소서노(召西奴) 를 제사하는 따로 있었으며, 신라에도 박혁거세 엄마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궁神宮이다. 신궁의 주신이 박혁거세니 김알지니, 혹은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된 미추니 하는 말은 다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신궁 주신은 바로 박혁거세 엄마다. 비궁閟宮을 후한시대 경학가 정현은 풀이하기를 바로 신궁(神宮)이라 했다.
고대 일본 천황가 뿌리를 이루는 이는 아마테라스노 오호미카미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이 천조대신은 성별로는 여성이다. 다시 말해 천황가를 있게 한 거대한 뿌리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다. 그를 제사하는 곳이 바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이세신궁은 종묘와 같은 곳이라, 그 내궁 주신이 바로 아마테라스다. 고대 일본 역시 건국시조 어머니를 제사하는 공간을 신궁이라 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강원은 상제의 엄지발가락을 밟고는 임신을 했던가? 그것이 다섯 발가락 중에서도 유독 남자 성기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 말은 강원이 상제와 교접을 하는 상태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오르가즘에 이르러 마침내 사내 아이를 임신케 되었다는 뜻이다.
섹스? 오르가즘?
이런 말 한다 해서 눈쌀을 찌푸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맨눈으로 포르노를 보듯이 정면으로 대해야지, 뒷방에서 키득키득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앞선 생민 편 구절 중에서도 유독 '리제무민(履帝武敏)'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많다. 이에서 履가 신을 신고, 혹은 맨발로 무엇인가를 밟는다는 뜻의 동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문제는 목적어인 '帝武敏'을 어케 보느냐다. 이때 '帝武敏'은 "帝의 武敏"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한데 이 두 가지 모두가 문제다. '帝'를 후직을 중심으로 하는 주 왕조 건국신화 혹은 그의 선조를 중시해서, 후직을 상고시대 전설적 제왕 중 한 명인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지만, 선진시대, 특히 은상(殷商)과 주(周) 왕조 시대에 저 글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저 하늘을 주관하는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지칭한다. 따라서 "帝의 武敏"은 '상제의 무민(武敏)'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민(武敏)은 과연 무엇인가? 이 역시 역대로 논란이 많지만, 나는 후한시대 저명한 경전 해석가 정현(鄭玄) 설을 따른다. 정현에 의하면, "武, 跡也。敏,拇也"라 했으니, 武란 곧 자국 혹은 자취라는 뜻이니 이 경우는 발자국을 말하며, 敏은 엄지발가락[拇]이다. 근자에는 '履帝武敏'의 의미 탐구만을 천착한 전문 논문이 중국 본토에서 더러 제출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이에 의하면 정현 설은 그가 살던 후한시대 특유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초한 견강부회라는 주장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 정현의 견강부회건 아니건 관계없이, 저 구절을 적어도 후한시대에는 엄지발가락으로 인식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늦어도 후한시대 이전에는 강원이라는 여인이 상제의 발자국 중 엄지발가락 자취를 밟고서 임신을 했다고 본 인식 체계 혹은 사고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하필 왜 엄지발가락이었을까?
그것이 곧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임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무릎을 치게 된다. 강원이 모종의 신이한 남자와 교접해서 낳은 아이가 바로 후직임을 상징하는 은유였던 것이다. 생민 편에서는 帝, 곧 상제라 표현한 상대 남자가 저 장면을 기술한 선진시대 혹은 진한시대 각종 문헌에서는 대인(大人)이라 하거니와, 대인이건 상제건 관계없이 후직은 위대한 남자의 혈통을 이은 위대한 천자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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