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한 사진 정보를 보니, 촬영일자가 2007년 10월7일이라 박힌다.
중국 사천성 아미산 인근 낙산대불樂山大佛이라는 당나라 시대 거대한 강안江岸 불상을 친견하러, 배를 타고 가는 길이다.
강이 아니라 바다처럼 보이나, 이곳은 종국에는 장강長江이라는 거대한 강을 형성하는 지류 중에서도 세 강 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이라, 벽돌탑이 희미하게 돌출한 저 강안 작은 산 오른편 강안에 전면을 바라보는 낙산대불이 서 있다.
내가 이곳은 아마 세 번인가 찾았다고 기억하거니와, 개중 첫 번째 아닌가 한다. 이때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월간조선 사진부장 출신 퍼타그러퍼 이오봉 선생, 《한국의 고고학》 발행인이자 도서출판 주류성 업주 최병식, 그리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이 동행했다.
대불 현장으로 접근하는 배는 이곳 건너편에 선착장이 있기도 하고, 저 맞은편에도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탐방객은 안전장비를 착장해야 한다.
같은 배에 탄 일행 중에 언뜻 일가족으로 보이는 중국인이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상대로 일가족이었고, 아미산시에 사는 일가부치라 했다.
뒷모습을 보이는 이가 이오봉 선생이라,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지켜보며 연신 웃었다는 기억이 있다.
뒷머리 상단부만 노출된 이 친구는 저 귀엽기 짝이 없는 '자매'의 남동생이었다.
내가 저들에게 말을 건 까닭은 저 자매가 그리 이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진 두어 장 찍을 요량이었으니, 이곳이 관광지라 그런지, 아니면 선상이라 더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런 전반의 여러 분위기가 뻘쭘함을 금방 말살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고 기억한다.
사진이 포착한 몇몇 장면을 보면, 시종일관 내가 대화를 주도한 듯이 보이며, 이오봉 선생이 몇마디를 거들었고, 자매가 상당히 즐거운 표정을 보인다.
나는 중국어를 못한다. 어느 정도 못하는가 하면, 내 희랍어, 러시아어 실력과 진배 없다고 보면 대과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 역시 아주 흥겨웠던 기억이 난다.
저들은 영어를 못한다. 둘다 대학 재학생이었으니, 왼편 파마머리가 인상적인 친구가 언니요, 오른편 생머리 통통이가 동생이다.
둘 다 성도 지역 이름께나 있는 대학 재학생이라, 영어는 어느 정도 된다 생각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친구들 영어 실력은 내 중국어 실력이나 피장파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이 자매요, 일가족이며, 어느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알아냈다.
기억에서는 지워졌지만, 저 두 자매 중 한 친구는 중의학 전공이라, 내가 이쪽에 관심이 특히 지대한지라 그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쏼롸쏼라 한마디 하지 못해도, 그런대로 까르륵 서로 웃어가며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한 힘은 필담筆談이다.
내 손에 든 것이 기자수첩과 펜인데, 저걸로 나는 저들의 이름과 심지어 이메일까지 땄다.
내가 찍은 너희 사진을 전해주겠다는 미명이었으니, 실제로 나중에 귀국해서 저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이 왔던 기억이 있다.
한자와 한문을 공통의 자산으로 삼는 전근대 동아시아는 적어도 문자를 아는 지식인 그룹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생각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게, 그리고, 훨씬 내밀한 감정과 사상까지 전달과 교유가 가능했으니, 이 역시 그 힘은 필담이었다.
이 필담을 실로 요긴하게 활용해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한 인물이 조선후기에는 쏟아져 나오거니와, 이른바 연경사라 해서, 조선왕조에서 정기 혹은 부정기로 중국 청나라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에 포함되어 중국 지식인과의 교유와 그것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사상을 선전하는 그룹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북학파라는 인물들이 거개 이에 속하거니와, 그 초창기 멤버 중 중국을 네 번 댕긴 박제가가 대표적이었고, 이후 그 절친 유득공도 북경을 다녀왔고, 이들 그룹의 대왕초인 박지원 역시 그 끝물에 딱 한 번 중국을 구경한다.
저들 중에서 박제가는 중국에 환장해 자신이 구축한 인망을 통해 이런저런 최신 정보를 중국에서 시시각각 접하고 그것을 조선 지식인 사회에 퍼뜨렸거니와, 박지원은 북학파 수괴라는 별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가 중국을 선진으로 간주하고, 그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시종일관해서 기울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접하는 방식이나 태도에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그는 시종 조선인의 자존심이랄까 하는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특출나게 간취된다.
이들이 물러난 자리에 우리가 익히 아는 김정희가 등장하거니와, 추사는 근현대기 미국물 먹고 환장한 미국쟁이보다 더욱 심각한 중국주의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에겐 조선의 스승은 없었고, 그가 스승으로 간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중국사람들이었다.
옹방강이며 필원이며 하는 이들이 그의 스승이었거니와, 아무튼 그의 중국 사랑은 지금의 내셔널리즘 시각으로 본다면 구토가 날 정도였다.
이들 중국에 환장한 사람 중에 중국어 능통자는 내가 알기로 없다. 박제가가 아마 기초 중국어 회화는 익힌 듯한데, 이 역시 자신은 없고 아무튼 능통한 수준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추사는 중국어를 전연 몰랐다.
앞에서 언급한 이들 말고도 같은 북학파 일원이면서 중국에 환장한 연암 연배 인물이 있으니 담헌 홍대용이라, 이 사람은 자기 저술을 나중에 자기 호를 따서 《담헌서》 라 뭉뚱거리거니와, 이 방대한 《담헌서》 는 간단히 정리하자면, 내가 중국을 통해 보고 들은 견문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국에 대한 비중 혹은 의존도가 높다.
어느 정도인가? 그 전부가 중국을 통해 습득한 새로운 지식의 보고라고 해도 하나도 틀림이 없다. 담헌 역시 중국어는 깡통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유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접한 비밀은 바로 필담이다.
이 필담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는가? 무엇보다 지필묵이 필참도구였으니, 무엇보다 종이와 먹은 핵심이었다.
이 필담에 얼마나 많은 종이가 허비되었을 것인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며, 나아가 먹물은 어찌 조달했을지 그 애로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먹물은 미리 갈아서 통에다가 담아 휴대하고 다니기도 했겠지만, 일단 본격 필담에는 먹물을 연신 갈아대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담헌은 아예 중국 방문에서 만난 중국인과의 필담을 나중에 아예 따로 저술로 정리하기도 했으니, 《담헌서》 에 실린 많은 글이 실은 이 필담록이다.
그의 유명한 저술로 《담헌서》 에 편입된 《의산문답》 은 지동설을 주창한 혁신적 저술로 간주되거니와(맞나? 자신이 없어진다 각중에), 이 역시 연행길에 만난 가상의 중국인과 주고받는 대화체 형식이다.
근대기 총칼과 아편을 앞세우고 동아시아로 몰려든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사회가 언어가 전연 통하지 않는데도 사상이 통한다는 점을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이는 그 이전 유럽 사회에서 라틴어가 수행한 역할과는 분명히 달랐다. 라틴어는 일부 성직자에 국한한 공통어였을 뿐이며, 더구나 그것은 말을 기반으로 했으니, 철저히 문자와 필담 기반인 한문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달랐다.
필담, 이는 말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힌 동아시아 세계를 하나로 뚫은 구마라집이요, 거대한 빵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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