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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 문장은 한 글자도 손 못댄다"는 고봉 기대승

by taeshik.kim 2018.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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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 광산 월봉서원 뒤편 고봉 기대승 부부묘



어우담(於于談)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그의 야담 필기류 집성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한 증언 중 하나다. 


문장을 하는 선비는 간혹 누가 그 문장의 문제점을 말하면 기뻐하면서 듣기를 즐겨하여 물이 흐르듯 그것을 고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발끈 화를 내면서 스스로 그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부러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고봉 기대승은 문장으로 자부해서 다른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지제교로서 왕명을 받들어 지어 올리는 시문에서 승정원 승지가 그 문제점을 표시하여 지적하면 그것을 가져온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며 꾸짖고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峰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 (柳夢寅, 「於于野談」; 洪萬宗 著, 허권수∙윤호진 교정, 原文 詩話叢林 卷秋, 까치, 1993, 167쪽)


고봉 기대승은 그 생몰년(1527~1572)으로 고려할 때, 어우담이 이를 직접 본 증언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고봉을 직접 겪은 관료들은 많았을 것이로되, 그들에게서 채록한 전언일 것이라 나름 신빙성이 높다 봐야겠다. 나아가 동시대 다른 증언을 봐도 고봉은 건방짐과 자부심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긴 그런 담대함이 당대의 석유碩儒 퇴계 이황과 한판 붙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향한 직접 비난도 당연히 많았으니, 율곡 이이 같은 이는 고봉을 아주 하찮게 보는 직접 글을 남기기도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제교란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 비슷하고, 응교란 임금의 명령에 응대한다는 뜻이다. 


이 유습이 어떤 글쟁이한테는 현대에도 강고하거니와, 내가 아는 어떤 인문학도 중에는 본인이 쓴 글이라면 조사 하나 손 못대게 하는 이가 있다. 이를 꼬장꼬장함을 말해주는 증좌라 해서 존경의 念을 바치는 일이 더러 있더라만, 글쎄, 내가 보니 그가 쓴 글을 글이 아니요 강바닥에서 막 긁어낸 자갈돌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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