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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다급한 서산 부석사, 발굴까지 했다는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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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 늦어도 고려 전기 창건돼 1330년경 사세 확장"
송고시간 2023-12-15 10:13 
석축·건물지 발굴조사 결과 보고회…참외형 주전자 조각 등도 출토
 

"서산 부석사, 늦어도 고려 전기 창건돼 1330년경 사세 확장" | 연합뉴스

(서산=연합뉴스) 정윤덕 기자 = 일본에 있다가 절도범에 의해 국내로 들어온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 소유권을 놓고 일본과 기나긴 소송을 벌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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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어찌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기차는 떠났는데, 설혹 저렇게 급하게 파서 부석사 창건 연대를 고려 전기로 확정한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솔까 나는 모르겠다.

더불어 부석사를 파서 고려 전기 유물이 나왔다 해서, 그것이 적어도 그때는 부석사에 사찰이 있었다는 직접 증거는 되지 못한다. 절이 아닌 다른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얼마든 있기 때문이며, 또 이걸로 그런 증거를 내세운다 한들 내가 말하는 저 논리에 또 당할 수밖에 없다. 

서산시가 이 조사를 급조하게 된 계기는 말할 것도 없이 대마도에서 한국 도둑놈들이 강탈한 본래 부석사 소장 대마도 불상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일본 반환 판결에 불복하고자 함이어니와 그렇다 해서 그것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석축과 건물터

 
법원이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부석사 법맥 문제인데, 간단히 말해 지금의 부석사가 저 불상이 제작 봉안될 무렵, 혹은 그것이 일본으로 반출될 무렵의 부석사와 법맥이 같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 간단히 말해 주인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고, 주인이 바뀌지 않았음을 부석사는 설득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난 이것이 대세는 아니라고 본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에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도 모르는 불상이 오로지 한국 부석사라는 데 제작 직후 봉안되었다 해서, 그것을 우리가 강탈해도 된다는 근거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기 때문이다. 도둑놈이 절취한 것은 본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것이 맞다.

이 경우 본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도난당한 시점의 일본 사찰이다. 
 

지표수습 유물들. 이거 보면 万자 새김 자기는 지표 수습인 듯하다.

 
이 간단한 법리를 각종 정치를 동원하고 국민감정에 호소해 비틀고는 고려말 선초 혹은 임진왜란 무렵에 왜구에 강탈당했느니 하는 주장으로 갈음하려 하지만,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는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뜻이다. 

저것이 왜구에 강탈당했다는 말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설혹 왜구에 강탈당했다한들 600년이 지난 지금, 40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저런 방식으로 돌려와도 된다는 논리는 되지 못한다. 

아무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의뢰해 추정 사역 범위 3만3천480㎡를 아마도 시굴조한 듯한데 길이 31m 규모의 석축과 건물터 2곳을 발굴하고 그에서 참외형 주전자편(靑磁瓜形注子片)과 청자상감 모란무늬 병편(靑磁象嵌忍冬文甁片), 만(卍)자와 공(公)자가 새겨진 기와편을 수습했다 하거니와 

저 성과 중 이곳에 불교 사찰이 있었다는 간접 증거는 卍자 새김 유물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저런 글자가 모름지기 사찰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곤혹스러움은 있다.

아무튼 이번 발굴성과에 대한 서산시 발표는 아래와 같다. 
 

2건물지 출토 유물

 
서산 부석사 고려시대 웅장했던 모습 드러나
- 서산 부석사 문화재 조사 최종보고회 개최 -

충남 서산시에 있는 부석사의 역사가 고려시대 전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음이 확인됐다.

시는 14일 시청 중회의실에서 ‘서산 부석사’의 고고학적 학술자료 확보 및 역사성 회복을 위한 문화재 조사의 최종보고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최종보고회에는 구상 부시장을 비롯한 관계 공무원, 서산 부석사 원우스님, 김옥수 충남도의회 행정문화위원장, 최동묵 서산시의원, 김낙중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을 비롯한 발굴조사단 등 10명이 참석했다. 

시는 지난 4월 (재)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협약을 맺고 고려시대 ‘서주 부석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추정 사역범위 33,480㎡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진행했다.  

이날 보고회에서 이호경 책임연구원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31m 규모의 대형 석축과 2동의 건물지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건물지 출토 유물



이어 청자 참외형 주전자편(靑磁瓜形注子片)과 청자상감 모란무늬 병편(靑磁象嵌忍冬文甁片), 만(卍)자와 공(公 )자가 새겨진 기와편 등 다양한 출토유물을 소개했다. 

출토 유물과 발굴 유구 등을 통해 서산 부석사가 늦어도 고려시대 전기에는 창건된 것이 확인됐으며, 고려 말경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제작된 1330년경에 대규모 공사를 통해 부석사의 사세가 확장되고 지금의 사찰 형태가 이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수덕사 근역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부석사 동종’(1669년)과 ‘부석사 극락전’ 내의 불화(1924년)를 근거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사찰의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뒷받침했다. 

시의 이번 문화재 조사는 서산 부석사 금동불상의 반환소송에서 제기됐던 ‘고려시대 당시 서주 부석사와 현재 서산 부석사의 동일성, 연속성’과 관련해 서산 부석사의 역사성 회복과 보존방안 모색에서 시작된 조사다. 

구상 부시장은 “서산 부석사의 실체적 역사를 되새기는 자리였다.”며 “문화재 조사성과가 ‘금동불상’ 환수 염원의 토대가 되어 지역사 회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석축유구 출토 유물


김낙중 (재)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대법원의 법률적 판단과 별개로 약탈이나 분실 등의 어떤 이유로든 해외로 나간 우리 유물들에 대한 조사나 환수 관련 문화 운동은 계속해서 이뤄져야 한다.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 지속적인 조사 연구에 이어 나가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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