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하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헷갈리는 사람이 많아 다시 정리한다.
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전 고려며 신라 백제 고구려 모두 왕을 필두로 하는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린 일을 들어 일부다처제가 아니냐 하고, 실제 무슨 얼어죽을 일부일처제냐 하지만, 단언하지만,
단군 이래 이 땅에 일부다처제가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저 많은 마누라는 무엇인가?
세종은 마느래만 28명인가 29명을 거느렸다 하고, 그리하여 잦은 잠자리 여성 교체는 매독을 불러오지 않았는가 하는 구설이 있거니와,
마느래가 29명이라는 것과 그들 모두가 정식 부인이라는 것과는 제우스가 내려치는 번갯불과 여름철 반디 한 마리가 내는 빛의 차이만큼 왕청나다.
한 남자에게 같은 시기에 법률이 허용하는 정식 마누라는 오직 1명이 있을 뿐이다.
이 1명을 일러 정처正妻라 하고, 그가 왕이면 정비正妃라고 하니, 나머지 우수마발은 첩 혹은 후궁이라 한다.
정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혹은 정처를 헌신짝 취급해서 골방에 쳐박아두곤 첩을 정부인 취급한 남자는 부지기에 이르나, 제아무리 정부인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라 해도, 오직 법과 관습이 허용하는 부인은 오직 1명이 있을 뿐이다.
이는 역대 왕을 보면 확연하거니와, 어떤 왕이 동시에 두 명 혹은 그 이상 되는 정비를 거느린 사례가 있다면 들어봐라.
물론 그런 경우가 아주 가끔 보이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칙을 벗어난 변칙 혹은 편법에 지나지 않거니와, 그런 경우에도 정식 부인은 오직 1명에 지나지 않으니,
예컨대 그것을 부정하는 사례로 흔히 드는 경우가 왕건이거니와, 후삼국 혼란기에 힘을 합쳐야 하는 그의 고뇌에 찬 혼인이 중첩으로 있기는 했지만, 그가 죽어 그의 무덤에 묻힌 여인은 오직 1명이 있을 뿐이니, 바로 이 여인이 정부인이다.
왕건 이래 고려 왕들이 차례로 죽어 나중에 종묘에 합사하게 되거니와, 이런 종묘에서 왕건의 짝은 오직 이 정부인 1명만이 종묘에 신주를 봉안하니, 그가 바로 왕건의 오직 단 하나의 배위配位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사례를 벗어나는 듯한 사례가 통일신라시대 한둘이 보이고, 고려시대에는 서너번 보이는 듯도 하지만, 단언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부인은 오직 한 명만 있을 뿐이다.
첩을 부인이라고 헷갈리지 마라.
이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에 견주어 우연한 특징인지 모르나 유목민 계통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부다처제 흔적이 상대적으로 농후하다.
하지만 이 유목민도 자세히 살피면, 일부일처제 흔적이 더 농밀하니, 언제나 첫 부인에게서 난 자식들이 각종 상속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점이 그 방증자료 중 하나가 된다.
(2017.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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